오륜교회

왜 고난이 기쁨인가? <제27권 7호 / 2015.2.15>

꿈 꾸는 소년 2015. 2. 23. 07:55

 <골 1:24>

 

 

 □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

 

 국민소득 3만 불이 되어 우리가 선진국 隊列에 들어 선다면 삶의 질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까요? 아닙니다. 많은 사회, 경제학자들은 빈부의 격차는 더 심화 될 것이고 상대적 빈곤으로 인하여 더 많은 불평과 근심과 두려움 가운데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화 국제시장 세대와 드라마 미생세대로 대표되는 세대 간의 갈등도 더 깊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편리하고 훨씬 더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절대빈곤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불평과 근심과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의 인생 역시 역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독교 역시 역설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 18:4).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자신의 여러 약함을 자랑하였고,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가장 많은 역설은 바로 고난이 기쁨이라는 역설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많은 경우 고난을 복이라 말하고 고난을 기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골 1:24절a).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을 때 그 이름을 위하여 凌辱을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며 기뻐하였습니다(행 5:41). 우리 예수님 역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迫害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1~12절a). 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고난과 기쁨이 함께 사용된 구절이 無慮 18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고난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고난을 복이라고 말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 왜 고난이 기쁨인가?

 

 첫째로, 주님과의 하나 됨.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 말씀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주님의 한 몸 된 공동체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인들이 복음 때문에 괴로움을 받는 것을 자신이 복음 때문에 괴로움을 받은 것으로 동일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난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벽하게 치루셨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시고 운명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인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주님을 따르기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바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은 고난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괴로움을 받고 있다면 그것을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내가 주님으로 인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은 내사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증표인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과의 친밀함.

 왜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까? 그것을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며 주님과의 친밀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왜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치욕을 받는 것을 복이라고 했을까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고난 받는 자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지 않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계심을 더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위로를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형통할 때 평탄할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모태신아앙이 아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인생의 밤을 만나고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한숨과 탄식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셋째로, 영광의 상급.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마 5:11~12a) 왜 예수님은 욕을 먹고 박해를 받을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그리스와 함께 한 상속자라면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롬 8:17절b) 베드로 역시 네로 황제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절a) 권면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말합니까? "이는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절b)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내면 주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때에 우리로 하여금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그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영광의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고난을 싫어합니다. 우리 중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받은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라고 말씀하시고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이 내가 주님과 하나님을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나의 모난 부분들이 제거될 수 있고 주님과 더불어 친밀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난이 우리에게 썩어지지 않을 영광스러운 상급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