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고개숙인 당신의 영혼을 위하여<제27권 9호/2015.3.1>

꿈 꾸는 소년 2015. 3. 1. 13:15

<시 43:5>

 

 □ 낙심되고 불안한 상황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네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5절a). 이 말씀을 보면 이 시인이 지금 낙심과 불안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그 영혼이 낙심이 되고 불안했으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 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시 42:5,11; 43:5)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하였을까요? 여기 낙심하여 불안해 한다는 말은 절망으로 인해 크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속으로 소리를 삼키면서 땅에 엎드려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낙심과 불안으로 인하여 고개 숙인 이 시인의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 왜 낙심되고 불안해 하였는가?

 

 첫째로, 사람들의 嘲弄과 蔑視

 "사람들이 終日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시 42:10) 지금 시인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와 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원수의 나라에서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대적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조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비난과 조롱으로 인하여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오랜 시간 동안 흘렸으면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했겠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할 때 자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멸시가 자신의 아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모독이 자신의 아픔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나의 아픔이 되고 하나님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침묵과 放任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절a)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시 42:9절a) 시인은 오랫동안 간사하고 불의한 자들에 의한 억압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마땅히 내게 힘이 되어야 할 하나님이 이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42편과 43편에서 "어찌하여"라는 말을 무려 10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방임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고난이 길어지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면 "하나님 정말 나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혹시 나를 잊으셨나요?"라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버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셋째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왜 시인이 낙망과 불안으로 인하여 고개 숙인 영혼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시인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서 큰 기쁨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길 원했습니다(4절a). 이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왜 낙심되고 불안해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것은 원수의 억압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원수들의 비난과 멸시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 고개 숙인 당신의 영혼을 회복하라

 

 첫째로,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외쳐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 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5절).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낙심되고 불안해 할 때 그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시인은 원수의 壓制로 인하여 슬픔 가운데 다니게 될 때에 원수들로부터 "네 하나님 어디 있느냐"며 멸시와 조롱을 받을 때 아니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잊어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솔직하게 외쳤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왜 낙망하고 있니? 네가 왜 내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니?" 시인은 지금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처하여 있는 상황과 느낌으로부터 분리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내 영혼이 낙심되고 불안할 때 가장 먼저 내 영혼을 향하여 외쳐야 합니다. 

 

 둘째로,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런데 여기서 끝이 나면 안됩니다. 영혼을 향하여 외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의사가 처방을 하지 않고 진단하고 끝내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을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외친 다음 처방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입니다. 시인을 자신의 상황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현실, 대적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향하여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해답이라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 

 

 셋째로,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양하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절b) 왜 이 시인은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합니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반석이 되신 그 하나님이 언젠가 나타나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면 두 단어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첫째는 "내 하나님" 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닌 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도 언제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만나고 내가 경험하는 나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여전히" 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을지라도 큰 소리로 여전히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합니다. 내 인생의 날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내 영혼이 낙심되면 낙심 될수로, 내 영혼이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오히려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