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5:21~24, 히 11:5
인생은 길입니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우리의 인생을 나그네 길로, 천국을 향한 여행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길은 나 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함께 동행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그런데 함께 걷는 인생이 길은 누구와 함께 동행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말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에녹이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동행이란 무슨 뜻일까요? 동행이란 '함께 걷는다'는 뜻입니다. '함께 걷는다.' '함께 산다' '함께 산책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겠습니까? 그렇듯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함께 걱는 것을 말합니다.
□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첫째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는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동행을 하려면 두 사람의 뜻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동행도 두 사람의 뜻이, 두 사람의 방향이 다르면 함께 동행할 수 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일치되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인생이 본향인 저 천국까지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구원받은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함께 걷는다고 해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는 바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함께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한 마디의 말도 주고 받지 않는다면 그것을 동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함께 동행 하려면 반드시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소통이 필요합니다. 약2: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웠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구라 불렀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든지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직전에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여 교제하셨습니다.(출33:11절a) 다윗도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 쳐 들어왔을 때에도 가장 먼저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삼삼23:2절a)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삼상23:2절b)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묻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대상10:14절a) 왜 사울왕이 죽었습니까? 여호와께서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구분과 대화를 나누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엔조이하는 것.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에녹은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성경을 보면 에녹은 어떤 공을 세운자도 아닙니다. 또 에녹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언급도 없습니다. 영웅이라든지, 가인처럼 성을 쌓았다든지 큰일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단지 그가 한 일은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는 말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았음을 말합니다. 소요리 문답 제1문에도 보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enjoy한다는 말입니다. 영어에 보면 to enjoy Him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enjoy하는 것은 의미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enjoy라는 말이 세상을 즐기는 아주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세상에 대하여서는 얼마나 enjoy하며 삽니까? 그런데 하나님에 대하여는 enjoy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당신의 기쁨조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안에 있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엔조이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 언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는가?
무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2절) "무드셀라를 낳은 후"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므드셀라를 낳기 전까지 65년의 인생은 그냥 '지내며'의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65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는 셋의 후손이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때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가인의 7대손 라멕이 복수와 살인을 예찬하고 하나님이 벌을 비웃는 그런 시대입니다.
유다서 1:14~16절을 보면 에녹은 경건치 않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섭리를 불평하고 원망하며 자기들의 정욕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죄악이 貫盈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22절을 보면 에녹은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산속에서가 아니라 수도원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에녹은 가장 최악이 시대에 가장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환경 때문이라고 가족들 때문이라고 핑계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기적 중의 기적은 죄인되었던 내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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