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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재열]썩혀 먹는 사회패 의 반부처방

꿈 꾸는 소년 2015. 5. 12.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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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2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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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이재열]썩혀 먹는 사회패 의 반부처방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날로 먹거나, 익혀 먹거나, 썩혀 먹는 것으로 문화의 심층구조를 분류했다. 서양과 중국에서는 불에 찌거나 볶은 음식을 주로 먹는다면, 일본은 날로 먹는 회가 중심이다. 1988년 올림픽 기간에 방한한 그를 감탄하게 한 것은 한국의 풍부한 발효 음식이었다.

유럽에는 우유를 발효한 치즈가 있고, 일본에도 콩을 발효한 낫토가 있지만, 고린내 나는 청국장이나 생선젓갈을 넣어 숙성한 묵은 김치, 걸쭉한 막걸리와 코를 뻥 뚫는 삭힌 홍어 맛을 당하랴. 외국인들에겐 오만상을 찌푸릴 역겨움이, 한국인에게는 어머니 품처럼 친근한 고향의 맛이다. 발효와 부패는 썩힌다는 점에서 같다.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 악취를 내거나 유독물질을 생성한다. 다만 일정하게 숙성하여 사람에게 유익하면 발효지만, 그 한계를 넘으면 부패인 것이다.

재(在)캐나다 원로 사회학자 장윤식은 한국을 퍼스널리즘, 즉 ‘인격주의 사회’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인간관계가 숙성되는 사회라는 뜻이다. 개인주의 서구의 사회관계는 익힌 요리 같아서 멸균형 계약관계를 지향한다면, 인격주의 한국은 의리(義理)라는 효모로 발효시킨 인맥으로 얽힌 사회다. 그래서 경조사 치르고 부조금 결산해 본 이들은 금방 눈치 챈다. 누가 의리 있고 누가 의리 없는 친구인가를.

상대를 인격체로 대하는 인격주의라서 한국 사회는 끈끈하다. 존경과 배려로 숙성되면 ‘선생’은 ‘스승’이 되고, 대폿잔을 함께 나누면 ‘갑과 을’은 ‘형님과 아우’가 된다. 그러나 강한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곧 폐렴으로 악화되는 체질의 감기환자 같아서 조금만 방심하면 부패하기 쉽다는 게 치명적 단점이다. ‘의리를 지키자니 정의가 울고, 정의를 세우려니 의리가 운다’고 어느 검사가 탄식했다던가. 아는 사람 봐주지 않고 원칙대로 하다가는 ‘의리 없는 놈’으로 찍히기 십상이다. 음식물의 부패가 영양분 많은 곳에서 시작하듯 권력의 부패도 권한과 자원이 집중된 곳에서 시작한다. 의리는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전용하는 인맥자산, 즉 청탁 능력으로 쉽게 변질된다.

인맥자산을 ‘한 개인이 맺고 있는 다양한 연고의 대상자 중 중요한 정보나 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활용해 직간접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동원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중요 직종별 인맥활용 정도를 측정한 2013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조사를 보면 전체 응답자 중 83%는 인맥의 덕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반면에 0.3%에 해당하는 극소수 응답자는 모든 직종에서 인맥을 활용했다. 불평등의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양극화가 심하다는 소득이 0.30에서 0.35 사이, 경제적 자산이 0.616에 불과한 반면에 인맥자산은 0.815로서 거의 완벽한 불평등을 나타냈다.

가장 부패 가능성이 큰 곳은 어딜까. 가장 많은 청탁 대상이 된 직종은 의사다. 진료나 입원, 수술 등을 앞당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의사 수가 11만 명이 넘는 데 비해 4급 이상 행정부 공무원은 6000여 명, 국회의원은 300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여 1인당 영향력을 추정해 보면 공무원은 의사의 약 5배, 국회의원은 의사의 약 50배에 이른다. 다 합쳐 5000명 내외인 판검사의 영향력도 이들 못지않게 막강할 것이다.

이는 기업 경영의 실패를 인맥에 대한 투자를 통해 반전시키고자 한 성완종 회장의 리스트가 왜 정치권에 집중했는지, 그리고 그의 ‘의리’가 얼마나 인맥자산에 대한 정교한 투자논리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고위공직자와 정치인을 타깃으로 한 김영란법이 국회를 거치면서 핵심적인 ‘이해충돌 방지’ 조항이 빠지고 그 대신 대상범위가 언론과 교육계로 확산되는 물타기로 마무리된 내막을 짐작하게 한다.

한국의 반부패 정책은 서구 계약주의 사회에서보다 훨씬 강한 과감성을 요구한다. 삭은 것과 썩은 것이 종이 한 장 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시’라는 인격주의 전통을 공유한 싱가포르와 홍콩의 반부패 성공모델은 한국에 주는 함의가 크다. 문화의 유전자까지도 바꾸겠다는 의지 없이는 지난 20여 년간 정체된 세계 40∼50위권의 투명성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리고 투명성 제고 없이는 더이상의 국가경쟁력 향상도 기대할 수 없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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