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한상진]제2근대를 여는 광복의 정치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꿈을 잃어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공포를 거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는 파탄의 상태다. 그런데도 국민이 희망을 걸 데가 없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는 낭패감, 어디 하나 믿을 곳이 없다는 허탈감, 관절이 어긋나고 나사가 풀린 위험사회, 국민은 안중에 없는 무책임한 여야 정치, 가족은 파괴되고 청년은 취업을 못 해 희망을 상실한 사회, 이런 이미지가 널리 퍼지고 있다. 피로감, 무력감 심지어 무관심의 독버섯이 사회 일각에 번지고 있다.
참으로 걱정이다.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은 이제 실종된 것인가? 오직 불신과 증오, 적자생존의 압박감, 살아남기 위한 이전투구뿐인가? 소수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국민 대중은 빈곤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겪는 모순과 위험, 갈등은 실패의 결과가 아니다. 근대화가 성공하면서 생긴 의도치 않았던 부산물이다.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따라 우리의 삶은 예민한 복합성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맞는 체제 운영의 조건을 갖추지 못해 그 격차가 온갖 문제로 터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관은 금물이다. 우리 안에 이미 성장한 잠재 역량을 모아 새로운 시대를 열 수도 있다. ‘제2근대’를 향한 세계적인 경쟁에서 우리가 앞서 갈 수도 있다.
혹자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거론한다. 권력구조에 초점을 맞추어 헌법 개정도 주장한다. 일리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견이다. 문제의 뿌리는 87년 체제가 아니다. 근대의 자기 파괴적 경향이다. 1960년대 이래의 엄청난 근대화의 성공이 전대미문의 위험사회를 낳았다. 돌진적 근대화를 자랑해온 한국사회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안전사회를 이끌 제도와 리더십이 허약할 뿐 아니라 국민의식과 문화도 현저히 뒤처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했던 ‘국가혁신’은 어쩌면 ‘제2근대’를 향한 전면적인 체제의 탈바꿈으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파란만장한 경로를 거쳐 우리가 성취한 근대의 지평을 넘는 역사적 기획이자 도전이다.
이 기획의 한복판에 있는 상상력의 보고가 바로 광복의 개념이다. 광복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미래의 상징이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광복을 독립으로 보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광복을 논한다. 그러나 독립은 광복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광복은 훨씬 더 광활한 꿈의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에 광복의 원대한 꿈을 꾸었던 선각자들의 지혜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 척박했다. 근대의 경험에서 광복은 외로운 섬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광복의 터전이 마련되고 있다. 김구 선생이 피력했던 ‘문화민족’의 꿈이 ‘한류’로 결실을 맺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고 우리의 잠재역량을 모아 미래를 열어가야 할 정치가 너무도 엉망이다. 국민에게 꿈을 주기는커녕 실망을 넘어 환멸의 대상이다. 설명 없이 결론만 적자면,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박정희를 컴컴하고 음습한 과거의 골방에 가둘 뿐이다. 문재인 야당 대표는 김대중의 철학을 철저히 외면한다. 결과는 열린 소통 대신 독선과 대립이다. 김구 선생이 1941년 2월 ‘광복’ 창간호에서 질타했던 대로, ‘좌우분열’, ‘대외의존’, ‘편견적 좌경주의’, ‘퇴보적 완고주의’, ‘망국적 근성인 지방열’ 등이 뒤섞여 혼돈 상태가 심화되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발상의 대전환이 요구된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더 이상 지하에서 통곡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광복을 향해 손을 잡는 새로운 시대가 와야 한다. 뜻과 용기를 갖춘 정치인이라면 기득권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동서를 잇는 풀뿌리 연대로 국민을 오도하고 분열시키는 괴물, 적대적 공생의 정당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 광복의 정치를 복원하여 ‘제2근대’를 열어야 한다. 북한도 광복의 가치에는 호의적이다. 한반도 광복연대, 매력적이지 않은가?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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