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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인규]‘진실한 사람’이 은혜를 저버릴 때

꿈 꾸는 소년 2015. 11. 21.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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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1 03:00: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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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인규]‘진실한 사람’이 은혜를 저버릴 때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 교수

서기 208년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군대는 적벽(赤壁)에서 오(吳)·촉(蜀) 연합군에게 대패한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보면 촉의 장수 관우(關羽)는 패주하는 조조를 화용도(華容道)에서 맞이한다. 사지에 몰린 조조는 관우에게 예전에 베풀었던 은혜를 상기시킨다. 옛 은혜에 괴로워하던 관우는 결국 그를 살려 보낸다.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 공약대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시작하려 든다. 그때 미8군 사령부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이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철군이 한반도를 다시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격분한 카터는 그를 소환해 예편시킨다. 하지만 미 여론은 싱글러브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결국 카터는 철군 공약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관우와 싱글러브는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에 해당할까? 박 대통령은 10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한 사람’에 대해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싱글러브는 몰라도 관우는 은혜를 잊지 않았으니 진실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적인 은혜 때문에 조조를 살려준 관우가 촉나라 편에서 과연 진실한 사람일까? 이처럼 누가 진실한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공(公)과 사(私)가 자주 충돌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한 분야인 ‘공공선택론(Public Choice)’에 따르면 정치인들은 공사 충돌 때 공익보다는 사익을 택한다.

개인들이 매 끼니 뭘 먹을지 선택해야 하듯 공공(국민)도 선택에 직면한다. 2012년 대선의 복지공약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 국민은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의 192조 원 공약 대신 새누리당의 134조5000억 원 공약을 선택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공공은 더이상 선택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약을 실행에 옮기는 선택은 공공의 위임을 받은 대통령과 정부, 그리고 여당이 내리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장밋빛 전망 아래 134조5000억 원짜리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 취임 후 계속된 경기 둔화로 인해 세수 증대는 고사하고 매년 결손이 났다. 이 결손 때문에 앞으로 갑작스러운 경기 활황이 닥치지 않는 한 증세 없는 복지는 물 건너갔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가까운 미래에는 오지 않을 경기 활황을 기다리며 증세 없는 복지를 고집한다. 위험하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의 경제 체질이 당뇨병 환자를 닮았기 때문이다. 이를 치유하려면 4대 부문(공공·노동·금융·교육) 구조개혁과 같은 다이어트와 더불어 공동체의 붕괴와 같은 조직 괴사가 오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빨리 구축해야 한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사회안전망 구축이 기약 없이 미뤄지다 보니 서민층과 청년층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 붕괴를 막아야 할 여당 정치인의 대다수는 공적인 ‘국민의 은혜’보다는 사적인 ‘대통령의 은혜’에 매달린다. 공공선택론이 예측한 그대로다.

보다 못한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용감하게 ‘국민의 은혜’를 앞세웠다. 그는 4월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대신해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사회안전망의 빠른 구축을 위해 ‘세금과 복지 여야 합의기구’를 국회에 설치하자고 야당에 제안했다.

유 전 대표의 이런 행동은 박 대통령의 진노를 불러와 석 달 뒤 ‘배신의 정치’ 파동을 초래한 원인(遠因)이 됐다. 박 대통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0일 ‘진실한 사람’ 발언을 통해 상중(喪中)의 유 전 대표를 한 번 더 몰아붙였다.

그러자 그간 박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던 대구경북(TK) 민심에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의 16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TK 지역의 박 대통령 지지율이 1주일 만에 13%포인트나 빠졌다고 한다. TK 민심도 이제 ‘현실’에 눈을 뜨는 모양이다.

‘진실한 공인(公人)’은 박 대통령이 말한 ‘진실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공익과 사익이 충돌할 때 사적인 은혜를 뒤로하고 공익을 택한 공인의 용기를 잊지 말아야 ‘진실한 국민’이다. 자신의 진급 기회를 희생해가며 한국을 도운 싱글러브 장군과 같은 공인의 용기를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자문(自問)해본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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