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육가의 간언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게임이론 관점에서 해석해 보자. 정권을 잡으려면 말 위에서 상대를 무찌르는 윈-루즈(win-lose) 게임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집권 후에는 말에서 내려와 정적(政敵)과도 윈-윈을 추구해야 국정 운영에 성공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윈-루즈 전투에 능하다. 2004년 ‘노무현 탄핵’ 후폭풍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을 구한 ‘잔 다르크’였다. 비록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한 차례 패하긴 했으나 2012년 마침내 대권을 쟁취한다.
박 대통령은 집권 후에도 여전히 말 위에서 호령한다. 최근에는 ‘배신의 정치’라는 호령 한마디로 새누리당 의원들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대표직을 날려버렸다. 하지만 이 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은 박 대통령 자신이다. 많은 국민이 환멸을 느끼며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박 대통령은 말에서 내려오는 걸 주저할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말 위에서 거둔 승리의 추억 때문이다. 둘째, 대통령이 누리는 정보의 우위를 능력의 우위라 여기기 때문이다. 착각이다.
먼저, 단기필마(單騎匹馬)로 거둔 것처럼 느껴지는 승리의 추억도 사실은 주변의 여러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1년 말 유승민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최고위원 사퇴를 통해 ‘홍준표 대표 체제’를 붕괴시켰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박 대통령이 대선후보가 되기 어려웠을 거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윈-루즈 게임에서 이렇듯 큰 도움을 준 유 전 대표를 윈-윈 게임 상황에서 내쳤다. 배신이다.
대통령은 모든 정보의 정점에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불편한 정보’를 불편해하면 정보의 우위가 오히려 독이 된다. 청와대 참모들이 ‘심기(心氣) 경호’를 이유로 정보를 가려서 올리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나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박 대통령의 미흡한 대처가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국정 운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다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육가’를 최측근 참모로 발탁해 비판하는 임무를 맡겨야 한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윗분의 뜻을 받들어…”는 청와대 예스맨들(‘얼라들’)의 일사불란한 충성을 상징한다. 왜 이런 충성이 문제가 될까?
경제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팀 하퍼드는 ‘어댑트(Adapt)’라는 저서에서 지금의 청와대와 같은 예스맨 조직의 충성이 어떻게 ‘집단사고(group-think)’로 이어져 일을 그르치는지를 분석한다. 집단사고(集團思考)란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 때문에 비판은 사라지고 동의만 남는 걸 말한다. 그는 ‘비판담당 참모’ 기용으로 이를 극복한 성공 사례를 소개한다.
유승민 전 대표는 청와대의 집단사고에 브레이크를 거는 여권의 거의 유일한 ‘배신자’다. 그렇지만 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배신자다. 예를 들면 그는 청와대의 친중(親中) 외교안보정책 때문에 우리나라가 중국에는 얕잡아 보이고 우방인 미국으로부터는 의심을 사고 있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대통령 곁에 ‘육가’는 없고 ‘얼라들’만 있다 보니 이런 식의 대형 정책 실패들이 발생한다.
둘째, 말에서 내려오기 전에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4대 부문(공공·노동·금융·교육) 구조개혁은 임기 내 마무리가 불가능하다. 4대 개혁을 완수하려면 새누리당의 재집권이 필요하다.
박 대통령을 추종하는 기득권 보수로 재집권이 가능할까? 어림없다. 시대는 변했다. 유 전 대표가 부르짖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진영을 넘어 합의를 추구하는 개혁 보수가 아니고서는 다수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육가의 간언을 받아들인 유방은 말에서 내려와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박 대통령이 유방처럼 말에서 내려올 수 있을까? 4대 개혁의 완성을 위해 ‘배신자’를 포용할 수 있을까?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박 대통령이 그런 용기를 발휘한다면 4대 개혁의 기초를 닦은 유능한 지도자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김인규 한림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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