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에세이/한국교회, 세상의 從僕으로 墜落할 것인가?
교회는 변화 일깨우는 ‘별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
세상과 타협 ‘값싼 편안함’ 누리는 추락 막아야
淺薄함 몰아내고 神靈한 복 되찾는 공동체 되자.
믿음의 삶
기독교는 현존하는 사회를 있는 그대로 두둔하고 떠받들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을 질문하고 변혁코자 한다. 기독교는 초월의 존재를 믿고 그 권위에 기대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초월의 존재와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뭇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가치에 사로잡혀 거기에 얽매어 살지 않는다. 그 가치를 돌파코자 한다. 세상 가치와는 다른 하늘나라의 가치를 사모하여 그것을 이 땅 위에서 표상해야 하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 세상 질서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거북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준다고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그 모든 것은 이기며 산다.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삶의 멋스러움과 복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별난 사람들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살았다. 이들은 조선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늘나라의 가치에 터하여 그 사회를 변혁해야 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조선 사회에 갈등을 자아내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별난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은 한문 중심으로 굳어진 중화주의의 틀을 부수었다. 오랫동안 짓밟혀온 우리글을 높이 들어 성경을 한글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우리글을 읽을 수 있도록 널리 펼쳤다. 이들은 남성 중심으로 제도화된 성차별의 벽을 무너뜨렸다. 오랫동안 억눌려온 여성들을 들어 올려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활동의 무대도 넓혀주었다. 이들 초대 기독교인들은 양반 중심으로 짜인 신분의 칸막이를 걷어치웠다. 오랫동안 업신여김을 당한 천민들도 예배 공동체에 함께 할 수 있도록 하였고 통합과 참여의 마당을 열어주었다. 이들 초대 기독교인들은 차마 조선 사회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유별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별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이치를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었으며 변화를 일깨우는 곳이었다. 기독교는 조선 사회의 가치와 그 됨됨이를 질문하고 전래하는 습속에 반란을 일으키는 변혁 가치의 불씨였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안팎의 핍박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별난 삶을 꿋꿋하게 살아갔다. 세상 가치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변혁코자 하였다.
보통 사람들
우리 사회가 이만큼 변하게 된 것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철저한 믿음과 당당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 글자인 한문 대신에 우리글인 한글을 소통의 매체로 삼게 되고, 성차별과 신분 제도를 허물고 평등과 공평을 제도화하게 된 데는 누구도 과소평가할 수 없는 기독교의 기여가 있었다. 별난 사람이라고 핀잔을 받아도, 사회 갈등과 불화를 낳는다고 비난을 받아도 그리하여 온갖 핍박을 당해도,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세상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이 변화된 시대에서 살게 된 것은 이들의 공로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미개와 야만의 시대가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한 세기만에 기독교는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 편함을 누리는 자리에 들어섰다. 아니, 기독교가 위세도 떨치게 되었다.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자 나라가 두 동강이 나서 서로 싸워 아직도 첨예한 적대 행위를 끝내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경제 성장도 이루었고 민주주의도 다시 살렸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지난날을 떠올리며 ‘잘 살게’ 되었다고 자랑할 수도 있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를 지켜가는 것이 유일한 과제인 듯이 모두가 요란을 떨 정도이다. 교인들 또한 이러한 자족감에 넘쳐 있다. 그리하여 ‘편해진’ 오늘의 삶에 ‘감사’한다. ‘별난 사람’으로 살던 때와는 달리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세상 돌아가는 대로 세상 가치에 따라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아주 마음 편하게 아무 탈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었다.
이 편안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어떤 까닭에 이렇게 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무엇 때문인가? 생각 있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물음을 지나치지 못한다.
값싼 평안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삶의 가치 지향성에서 세상 사람들과 근본의 차이점을 지니고 있지 않다. ‘평균치의 인간’ 곧, 보통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꿈을 꾸고 꼭 같은 것을 선호하고 꼭 같은 잣대로 삶을 재고 꼭 같은 성공의 사닥다리를 올라가고자 한다. 교인이라고 해서 어딘가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을 선호하는 것도 아니다. 다른 잣대로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길을 걷는 것도 아니다.
모금 운동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관행이 보기가 될 수 있다. 모금 액수의 크기에 따라 대중 매체에 오르는 기부자 이름의 글자 크기가 달라지고 얼굴 사진이 뜨고 안 뜨게도 된다. 기독교계 매체도 충실히 이러한 관행을 뒤따른다. 교회 안에서도 매마찬가지이다. 이런 관행을 두고 누구도 거북해 하지 않는다. 거기에 어떤 물음도 던지지 않는다. 물질의 크기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자리의 순서를 정하는 데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그러한 관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만큼 기독교인들도 세상 가치에 빠져 무디게 되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가치에 도전하고 반란할 수 있는 능력을 숫제 잃어버렸다. 세상 가치의 틀에 쳇바퀴 돌듯 모든 것을 맡기고는 어떤 의문이나 질문 없이 무감각하게 살아간다.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 그것을 마냥 감싸고 역성들기만 한다. 세상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의 종복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과연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참다운 믿음을 지켜가는 사람은 바로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누구도 이러한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초월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현존하는 삶에 대하여 질문하고 그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삶을 휘몰아가는 세상의 요구와 영합하고 거기에 묵묵 순응코자 할 뿐이다.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세상의 가치에 맞장구만 치려 한다. 그 맞장구의 대가로 세상 안에서의 ‘편안함’을 선물로 받고 평탄한 삶을 살아간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값싼 편안함이다.
교회의 추락
교회는 값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이는 공간이 되었다. 세상의 가치와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들, 어떤 물음도 던지지 않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는 그것을 섬기는 이들이 떼 지어 모여 우글대는 곳, 이곳이 오늘의 교회이다.
권력의 포학으로 시달리는 약자의 억울함에 대하여, 재력의 횡포로 괴로움을 당하는 빈궁한 자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교회의 금기 사항이 되어 있다. 어쩌다 그러한 말이 튀어나오면 교중은 금세 당황하고 불편해 한다. 우리가 보살펴야 할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이야기를 오늘의 상황으로 풀어내면, 교중은 엉뚱하게도 ‘정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내뱉는가 하면 ‘은혜롭지 못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만큼 오늘의 교회가 기득권의 논리에 휘둘림을 당하고 있다. 교회가 한낱 현존하는 권력과 재력을 떠받들어 시중드는 기득권 체제의 하부 세력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나라의 교회는 초라한 몰골이 되었다. 교회가 한껏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지만 세상 가치에 무릎을 꿇고 연명해가는 비굴한 노예의 자리로 떨어져 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세상의 가치에 맞춰 하나가 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가치에 예속되고 집착해버린 꼴이 되었다. 교회가 앞에 서서 인도하는 세상 가치를 받아들여 그 논리에 장단을 맞춰 충성스레 뒤따르는 나팔수 노릇을 하는 격이 되었다. 경제를 내세우는 세상이 규모의 크기를 늘리고자 하는 거대주의를 선도하게 되면서 교회도 어떤 주저함 없이 그 규모의 크기를 늘리고자 하는 거대주의의 넓은 길에 들어섰다. 경제의 크기가 권력의 영향력을 보장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목회도 규모의 척도에 맞춰진다. 재벌총수들의 모임처럼 대형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끼리 함께 만나는 모임도 등장한다. 그들은 어떤 켕김이나 스스럼없이 몇 인방이니 하며 그 모임의 실재를 떠벌리기까지 한다. 마치 그 거대주의가 교회 부흥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그것이 유일한 목회 성공의 척도인 것처럼 우쭐거린다. 교회 규모의 크기가 교회의 위세를 보여주고 그것이 목회자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규모의 크기로 성공의 척도로 삼는 세상의 가치와 교회가 뒤범벅이 되어, 앞 다투어 세상 사람들이 들어서 있는 ‘문이 크고 길이 넓은’ 그 곳으로 들어서고자 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험하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서지 않고 험한 길로 가지 않는다. 세상이 표상하는 가치의 틀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찾아 정착하는 교회는 세상의 가치에 흠뻑 빠져 그 체제의 근본 문제를 깊이 헤아리고자 하지 않는 그런 곳이다. 그들이 ‘자기에게 맞는’ 교회라고 변호하고 스스로 정당화하는 교회는 근본의 수준에서 세상의 가치를 질문하고 그것을 바꾸어 바로잡는 데 겨냥되어 있지 않다.
회복의 길
이제 한국의 교회는 새삼 말씀에 비춰보아야 할 때를 맞고 있다. 오늘의 삶을 마구 휘어잡아 몰아붙이고 있는 경제 위주의 세상 가치에 파묻혀 이지러진 현실 교회의 모습을 추슬러 그 참 모습을 되찾아야 하고, 세상의 가치를 마치도 ‘하늘의 뜻’인 듯이 그것과 동일시하여 자기 축소와 왜곡을 자초하게 된 현실 교회의 모습을 꿰뚫어 그 참다운 실체를 다시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올 수 있을 것인가? 궁극의 실재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초월의 가치와 이상에 대한 믿음을 되찾는 일, 여기에서 그 해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은, 이 세상의 가치에 사근사근하면서 그것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에 순조로운 적응의 삶을 거부한다. 하늘의 가치를 내동댕이치고는 거들먹거리는 이 세상의 가치 밑에 엎드려 세상의 종복으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 세상의 더 많은 부나 더 큰 권력을 움켜쥐기 위해 옳고 그른 것 가리지 않고 맹렬히 달려드는 삶을 당연시하는 이 땅의 가치 지평 그 너머를 알리는 말씀의 공동체이며, 이 세상의 천한 삶 그 너머 신령한 세계를 일러주는 거룩한 공동체이다. 진정 초월의 존재를 표상하는 교회라면 그렇다. 그러한 교회만이 세상의 천박함을 몰아내고 신령한 복의 멋스러움을 풀어낼 수 있다.
박영신 명예교수(연세대 사회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