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후 1:15~20>
2011년 우리교회 標語는 '하나님께는 Yes, 사단에게는 No!'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는 Yes, 사단에게는 No!'를 올 해의 표어로 정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사단에게 어떻게 反應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고 축복과 저주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漠然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마귀와의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단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恩惠를 얻기 위하여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나고 난 다음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며 신비한 체험을 복음보다 더 강조하면서 混亂 가운데 빠지게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하였는데 이유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입니다(15절). 바울은 단순히 만나서 얼굴만 보고 헤어지고자 함이 아니라 은혜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그들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나누기 위해 그들을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의 만남에는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2011년에는 우리 성도들의 모든 만남의 모임 가운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 바울의 Yes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 자신이 信實하심과 같이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도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다고 말합니다(18절). 왜 갑자기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바울을 對敵하는 자들이 바울을 향하여 신실하지 못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輕率한 사람이라며 바울을 非難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바울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 방문이 여러차례 飜覆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러차례 고린도교회 방문이 변경된 것을 因하여 사람들은 바울을 경솔하게 행동하였다며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신실하지 못하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게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거액의 헌금을 맡길 수가 있겠느냐며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디도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바로 잡기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입니다. 먼저 바울은 17절에서 자기 자신을 어렇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획할 때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17절)" 바울은 계획 변경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계획 변경은 자신이 신실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행동이 감정에 치우친 행동 또한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의 변경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의 어떤 이해타산에 따라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미쁘신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18절). 바울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 때에도 바울은 계속해서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이 계획과 생각을 내려놓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Yes로 대답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미쁘신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바울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 방문의 계획이 변경되면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이 상처를 받는 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비난보다 상처보다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Yes로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께는 Yes, 사단에는 No를 외쳤던 사람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Yes와 No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실함을 Yes로 표현했던 바울은 19절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Yes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도는 예 하고 아니라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Yes였습니다. 한번도 No라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죄없는 인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Yes로 순종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Yes로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 앞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단의 요구 앞에서는 분명하게 No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세 번의 유혹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No를 선언함으로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 오직 아멘
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이나 당신의 종들을 통해 주신 약속은 모두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성취되었기에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라고 말합니다.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20절b)" 아멘이라는 말은 "진실로, 정말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멘은 긍정적인 믿음을 대표하는 단어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아멘 그 자체이시입니다(계3:14절).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아멘이라는 말을 106번이나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 제자된 우리도 아멘 의 신앙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왜 우리는 아멘을 해야 합니까? 그것은 아멘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20절b)" 아멘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신앙고백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것입니다. 아멘은 淺薄한 사람들의 표현이 아니라 가장 건강한 사람들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멘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아멘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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