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2010.12.12 / 제22권 50권>

꿈 꾸는 소년 2010. 12. 15. 18:55

☞ <빌 3:18 ~ 19>

 

 □ 여러번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18저a)"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바라보며서 여러 번 반복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습니다. 원래 바울은 눈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아주 사납고 딱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남의 軟弱함을 肯恤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기준대로 정의의 칼을 뽑아들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假借없이 잘라버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冷嚴했던 바울이 눈물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언제 이렇게 바울이 눈물의 사람으로 변하였습니까? 바로 다메섹 途上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용납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바울이 너무 많이 울어서 안질에 걸렸다"라고 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이후 구원의 恩寵과 感激 때문에 평생 눈물 가운데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선교지를 향하여 달려 나아갈 때에도 구원의 감격 속에 나아갔고 목회를 할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목회를 하였습니다(행20:31). 바울은 신학적 교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훈계한 것이 아니라 눈물로 각 사람을 訓戒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반복하여 勸勉 하고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권면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겨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권면해 본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후로 우리의 삶 가운데 눈물의 권면이 있기를 바랍니다.

 

 □ 누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인가?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8절)" 여기서 말하는 말은 '적' '대항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여러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1.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行爲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우리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고 苦難을 받으셨고 목마름의 苦通을 당하셨고 죄 값은 사망이기에 마침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殞命하시기 전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는 말인데 값을 支拂하다. 完拂하다. 淸算하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 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시고 청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런 고난과 刑罰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는데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2. 반도덕주의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바로 반도덕주의자들입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를 입게 되었으니 어떻게 생활하든지 영생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도덕적 방종주의에 빠져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인생을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더 이상 구원을 위해 노력하거나 훈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방종의 의미로 잘못 이해하고 방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반도덕주의자들을 향하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 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 아되는가?

 

 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 안됩니까? 그들의 마침이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19절a)" 여기서 그들의 마침은 그들의 인생 끝 終末 최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최후는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멸망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에 고통에 치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완전한 멸망을 말합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아니 이 세상에서 인생을 즐기면서 豊饒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여러번 반복하여 勸勉하였고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사단이 나늘 참소하여 나를 세상의 넓은 길로 인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바울처럼 날마다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탐욕이 내 안에 있는 정욕이 내 안에서 꿈틀 거리며 올라올 때 나의 그 정욕을 십자가에 앞에 가지고 나아가 목을 박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에도 나의 그 교만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을 붙들고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왜 사람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합니까?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합니까?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