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8:30~35>
□ 그때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30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은 그때가 언제입니까? 아이성의 전투가 끝나고 난 바로 그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에서 가장 堅固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은 내친 김에 아이성까지 치고 들어갔습니다. 여리고성에 비하면 아이성은 정말 작은 성이었습니다. 모든 주민을 합해도 1만 2천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城邑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군대를 動員하지 않고 2~3천명의 군사만 보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慘澹한 敗北였습니다. 아이성의 전투에서 36명이 전사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렇게 참담한 패배를 하게 된 것은 한 사람 아간의 犯罪 때문이었습니다. 아간이 어떤 전리품도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으 명령을 거역하고 戰利品을 취하여 숨겨 놓은 것입니다. 물론 아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를 하였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자만 때문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크고 견고한 성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다음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승리의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는 매일 침묵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는 순간,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다음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였다는 사실이 없습니다. 승리의 感激에 淘醉되어 어찌할 줄 몰랐지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그들의 패배는 豫見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自慢하였고 자만하였기에 아이성의 전투에서 패배를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자만과 아간의 貪慾으로 인하여 뜻 밖의 패배를 경험하였던 이스라엘은 마침내 아간을 쳐 죽이고 悔改함으로 다시 아이성을 攻擊하여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롤 아이성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을 때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으로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 禮拜가 우선입니다. 예배가 성공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30절). 아이성 싸움의 패배를 극복하고 다시 대반격에 성공한 여호수아는 북쪽으로 48km 가량 떨어진 에발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갔습니다. 적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제 다음 성드을 攻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 9:1~2을 보면 아이성의 전투 이후 가나안의 모든 族屬들이 연합군을 結成해서 이스라엘과 一戰을 치루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항속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쟁터도 아닌 에발산으로 移動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하고 戰術的으로는 無謀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48km 가량 떨어진 세겜의 에발산까지 이동을 하여 그곳에서 여호와를 이하여 단을 쌓은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성의 패배를 통하여 예배가 곧 성공이며 예배보다 우선 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전쟁이 渦中에 싸움에 지친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까지 와서 여화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예배의 성공이 곧 인생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예배의 승리가 곧 인생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 예배보다 더 우선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실패란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을 쌓지 않는 것입니다. 단을 쌓아야 할 때 단을 쌓는 사람이 진정한 성공자인 것입니다.
□ 다음지 아니한 祭壇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에 도착한 여호수아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자연석 그대로 단을 쌓고 그 제단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습니다(31절). 하나님은 인간이 손으로 다듬어진 제단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제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당시 가나안 족속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예배들이기 위해 만든 단은 사람의 技巧로 잘 다듬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제단을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꾸밈이 없는 純粹한 예배입니다. 상한 모습 그대로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의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蔑視하십니다. 반면에 마음이 상한 자를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넘어졌으면 넘어진 그대로 나아오십시오. 軟弱하면 연약한 모습대로 나아오십시오. 무너졌으면 무너진 모습 그대로 나아오십시오. 또 넘어지고 또 넘어졌을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예배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예배입니다.
□ 에발산 詛呪와 그린심산의 祝福
여호수아는 율법에 기록한대로 에발산에서 다듬지 않는 돌로 단을 쌓고 燔祭物과 和睦祭物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의 目前에서 그 돌에 기록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言約櫃를 중심으로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宣布하도록 하였습니다(33절).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선포될 때 백성들은 "아멘"으로 和答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명령을 하기 전에 이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두었으니 너희는 '그리심산 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 앞에 북과 저주를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북과 저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북과 저주가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축복의 그리심산과 저주의 에발산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심산을 선택할 수 있고 내가 에발산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운명에 맡겨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저주 받을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내팔자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늘의 운수도 믿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의 윤회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전생의 업보에 따라 이 땅에서의 운명이 결정되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복을 받을 운명, 저주 받을 운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복과 저주는 지금 당신 앞에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당신이 복을 선택하면 복 받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저주를 선택하면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심산을 선택하면 그리심산처럼 푸르고 생명의 기운이 躍動하는 밝은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에발산을 선택하면 荒廢하고 그늘진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주가 아닌 축복을, 에발산이 아닌 그리심산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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