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15>‘시간의 집’ 황룡사지
동아일보DB
카라코룸(몽골제국 초기의 수도)의 에르데네주 사원도 황룡사만큼 크지 않다. 도통 뭘 남기려 하지 않고, 사는 집마저 말 등에 싣고 다니는 그들에게 이 엄청난 집이 주는 감상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553년인 진흥왕 14년에 궁궐을 지으려다 계획을 바꿔 착공한 황룡사는 16년 만인 569년에 완공되었다. 처음부터 9층탑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9층 목탑이 세워진 것은, 다시 4년 뒤 말 그대로 1장 6척(약 4.5m)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성하고, 584년인 진평왕 6년에 금당을 조성하고 난 후인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그러니까 9층 목탑은 진흥왕과 진평왕, 선덕여왕 3대에 걸친 대공사였으며, 재위 기간이 짧았던 진지왕까지 포함하면 4대가 되고, 공사 기간만 따져 봐도 90년이 넘는 대역사였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깨비 대장 비형랑의 실제 인물이라고 짐작되는,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이 이 9층 목탑의 건축을 현장에서 지휘했다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귀교(鬼橋)를 세웠던 비형랑과, 9층 목탑의 역사를 이룬 김용춘이 더더욱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요즘에는 다들 도깨비 대장이나 된 듯 오래 차근차근 해야 할 일들을 불과 몇 년 만에 뚝딱 해치우고 업적이고, 치적인 양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코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신라가 불국토임을 증명하려 했던 그 모든 노력들도, 그것을 불태운 초원의 전사들도 사라져 버렸다. 굳건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이 저녁, 모두들 긴 그림자를 드리울 때 황룡사는 다시금 거대한 허(虛)로 남는다. 저것이야말로 시간의 집일 것이다. 시간의 그림자는 지상에 드리우지 않는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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