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16>경주 교동 최준 고택
동아일보DB
이 어마어마한 대지주의 종가에서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이 사랑채 뒤쪽에서 사당으로 가는 길이다. 최준 고택은 곳간이 두 채가 있지만 사실 이 터의 안산인 도당산이 풍수상 창고사라고 불리는 곳간 형상이다. 그런데 집 뒤의 주산이 약하다. 그래서 이 집의 북쪽에는 쌍으로 심어진 나무가 무성하다. 일종의 비보림(裨補林·부족한 곳을 채우는 나무)인 것이다. 이 비보림이 뒷산에서 사당을 통해 사랑채까지 이어진다. 사당은 보통 집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이 집은 방위보다는 터에서 가장 높은 곳을 잡다보니 서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여느 종가보다 사당이 높지 않고 편안한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 잡고 있어 늘 푸근하다.
그러나 이렇게 곳간 형상의 안산이 있고, 비보림으로 약한 지세를 꾸몄다고 해서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부를 일굴 수 있었던 것은 이 집의 준엄한 가풍 때문이다. 일컬어 ‘육훈’이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시집 온 후 3년 동안은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육훈’을 충실히 지키면서 경주 최씨는 12대 만석꾼을 배출했다. 최준은 일제강점기에 백산상회를 설립해 안희제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댄 바로 그 사람이다. 정직한 자본은 만인을 살리며, 따뜻한 자본주의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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