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17>‘나누는 자본주의’ 운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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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하도 커서 전체적으로 좀 허망해 보였다는 게 솔직한 인상이었다. 대부분 종가들은 좀 허망하다. 미학적인 구성보다는 종가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또 상당 부분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 앞에 놓인 네모꼴 연지(蓮池)도 어딘지 집과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운조루가 자리하고 있는 전남 구례의 오미리는 지리산의 남쪽 능선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 섬진강이 흐르고 너른 들이 펼쳐진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명당이다. 반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의미인데, 여인에게 있어 반지는 출산할 때 외에는 잘 빼놓지 않는 소중한 것인 만큼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례가 어떤 곳인가? 지리산 아래 있다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함부로 명당 운운할 것이 못 된다. 경주 교동의 최준 고택이 그렇듯이 구례의 운조루가 질곡의 현대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문화 류씨 가문에 내려오는 나눔의 정신 때문이었다. 풍수상의 명당이 부를 가져다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분명 항상 남들과 함께하는 길만이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라는 가문의 정신 때문이었다. 동학과 빨치산, 6·25전쟁을 겪으며 많은 부자가 피해를 보았지만 이 집만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집에는 굴뚝이 없다. 굶는 집들이 많았던 당시, 그렇다고 같이 굶을 순 없고, 연기라도 감추기 위해 굴뚝을 없앴던 것이다. 소심한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문 앞에 있는 뒤주를 보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 대문 앞에 뒤주가 나와 있는 건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다.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든지 마음대로 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난한 이들과 같이 나누려는 운조루 사람들의 마음에,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위한 배려에 숙연해졌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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