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뉴스룸/권재현]‘죄의식 없는 환상’의 위험성

꿈 꾸는 소년 2012. 3. 1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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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28(화) 03:00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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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권재현]‘죄의식 없는 환상’의 위험성

권재현 문화부 차장

마을 언덕 위에 오래된 흉가가 있었다. 마을 사내들은 술집에만 모이면 흉가에 얽힌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 집에서 몰래 데이트를 즐겼다, 친구들과 담력내기를 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도회지에서 귀향한 청년이 이를 듣다가 ‘그게 정말 사실일까’란 생각을 했다. 의문을 풀기 위해 그는 깊은 밤 그 금단의 공간에 발을 디뎠다. 청년이 거기서 발견한 것은 무(無)였다. 사내들의 숱한 무용담을 증명할 어떤 흔적도 못 찾았기 때문이다.

금기된 탐험을 마친 청년은 술집으로 돌아가 허풍쟁이 사내들에게 진짜 무용담을 들려준다. 이를 듣던 사내들의 눈빛이 바뀐다. “정말 그 집에 들어갔다고?”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고?” 결국 청년을 술집 밖으로 끌고나간 마을 사내 중 하나가 청년을 죽인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자로 유명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소설 ‘검은 집’의 내용이다. 도대체 청년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흉가의 실체를 폭로한 게 목숨을 내놔야 할 만큼 큰 죄일까.

슬라보이 지제크는 답한다. 청년은 마을 사내들의 내밀한 환상공간에 침입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마을 사내들에게 흉가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과 현실에선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투사하고 실현시켜주는 일종의 환상 스크린이다. 청년은 그 짜릿한 해방공간을 누추한 현실공간으로 돌려놓은 죄를 저지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에서 검은 집을 향해 환상을 투사하는 존재는 남자들뿐이란 점이다. 여자들은 검은 집에 대한 남자들 환상의 작동을 중단시키는 훼방꾼이거나 그 환상에 대한 접근이 금지된 이방인으로 묘사된다.

여자들에게도 자신들의 은밀한 꿈과 환상을 투사할 환상스크린이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하얀 집’으로 불러야 할 만큼 남성적인 ‘검은 집’과 대조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 검은 집이 어둡고 음습하다면 하얀 집은 밝고 환하다. 검은 집은 밤의 베일이 필요하지만 하얀 집은 눈부신 햇살 아래서 더 빛을 발한다. 햇빛을 받으면 검은 재가 돼버리는 남성적 뱀파이어 드라큘라와 햇빛을 받으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여성적 뱀파이어를 비교해 보라.

둘째, 검은 집은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 존재근거(리얼리티)를 요구하지만 하얀 집은 현실과 유리된 순수 환상의 산물이어도 상관없다. 똑같은 드라마라도 남자들이 열광하는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이란 실존인물이 필요하지만 여자들이 열광하는 ‘해를 품은 달’은 모든 등장인물이 가상의 존재라는 점을 기억해 보라.

셋째, 검은 집은 여자들 앞에선 은폐되기 일쑤지만 하얀 집은 굳이 남자들에게 감출 필요가 없다. 선망하는 배우의 모습을 남성은 이성 몰래 훔쳐보기 마련이지만 여성은 이성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빠져드는 이유다.

 얼핏 보기에 하얀 집의 환상이 검은 집의 환상보다 건강해 보인다. 남성은 환상을 잉여의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여성은 결핍의 보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일까, 환상에 탐닉할 때 여성은 남성보다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된다.

 함정은 거기에 숨어 있다. ‘죄의식 없는 환상’은 현실 도피로 귀결되기 쉽다. 하얀 집의 환상에 심취한 사람은 영화 ‘매트릭스’ 속 ‘파란 약’(삭막한 실재)이 아니라 ‘빨간 약’(달콤한 환상)을 택하기 쉽다는 소리다. “힘든 현실을 잠시 잊으려고 드라마를 보는 건데 리얼리티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여자들 항변이 위험한 이유다.

권재현 문화부 차장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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