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8:1~11> 음행중에 잡혀온 여자가 용서 받다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淫行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姦淫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律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한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呵責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법하지 말라 하시니라]
음악을 듣는 데도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있습니다. 음악을 오래 사랑하다보면 큰 규모의 음악, 이를테면 심포니나 콘체르토 등은 잘 안 듣게 됩니다. 오히려 실내악이나 독주 같은 작은 규모의 음악에 더 心醉하게 됩니다. 또 華麗하고 搖亂한 1樂章 보다는 여리고 조용한 2악장의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즉 음악의 年輪이 쌍일수록 음악을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감동시키는 데는 많은 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의 작은 소리, 가늘고 여린 하나의 音律이면 족합니다. 작고 낮은 부드러운 소리 한마디면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充分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 細美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도, 엘리야를 부르실 때에도, 이사야를 부르실 때에도, 마리아를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은 낮고 세미하고 조용했습니다.
큰 소리 뒤에는 싸움이 있고 紛爭이 있고, 전쟁과 살인과 폭력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입니다. 텔레비전의 연속극은 고함치고 싸우는 장면이 대부분입니다. 다방에 가도 음악 소리, 사람 소리가 너무도 큽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 장소는 高聲과 삿대질이 오가는 전쟁터를 彷彿케 합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불협화음의 사회입니다. 분쟁의 사회요, 미움의 사회요, 猜忌와 嫉妬의 사회요, 權謀術數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 작은 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소리 뒤에는 평화가 있고 용서와 사랑과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장면은 한 여인을 가운데 세워두고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각각 들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소리는 큽니다. 殺氣騰騰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목소리는 작습니다. 단 한 마디의 짧고 낮은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주님의 음성 속에서 나 자신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여인을 앞에 세우고 恐怖의 분위기를 造成합니다. "이 죄지은 여자를 어떻게 할거냐?"라고 고함을 칩니다. 살인과 미움과 詛呪와 憤怒를 부르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의 손에는 모두 돌려 있습니다. 죽음과 살인의 분위기입니다. 그 때 이 고함소리를 壓倒하는 조용한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보아라." 사람들의 心靈에 波紋을 일으키는 조용한 소리입니다. 생명을 부르는 세미한 음성입니다. 용서를 創造하는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손에 들었던 돌을 놓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 소리를 통하여 자신을 돌이켜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가?" 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죄 없는 자가 쳐보아라." 이 음성을 들으면서 우리의 손에 남을 향해 들었던 돌을 놓아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주님의 음성 속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내 손에 다른 사람을 향한 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손에는 나를 향한 심판의 돌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쳐라."고 한 말씀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네 죄를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돌을 던져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음성 속에서 이웃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바리새인들이 고함 소리 속에서는 죽어 마땅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조용한 음성 속에서는 용서해야할 여인입니다. 똑 같은 사람도 고함지르고 싸울 때는 죽일 사람이지만 조용히 생각해보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바리새인은 고함을 치고 있고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 죽일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살려줄 사람입니다. 똑같은 대상이지만 바리새인들은 埋葬시키려하고 예수님은 감싸주려 하십니다. 헐뜯는 목소리로 가득한 상황에서 조용한 위로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도 너를 용서한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소리에 여인도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가 사람을 죽이고 있나, 살리고 있나? 싸움을 걸고 있나, 和解를 圖謀하고 있나? 非難하고 있나, 이해하고 있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나,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나? 나는 한 인간을 앞에 놓고 바리새인의 역할을 하고 있나, 예수님의 역할을 하고 있나? 조용하게 말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인간을 향하여 용서의 목소리를 발하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모방하십시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즉 "내 손에는 너를 향한 돌이 없다."고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본받으십시오.
주님께서 조용한 목소리 한마디로 殺氣騰騰한 수많은 적들의 목소리를 이기고 들었던 돌을 놓게 만든 秘訣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엄청난 영적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의 1절에 있습니다. "예수 감람산으로 가시다." 주님께서는 그 전날 밤에 감람산으로 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영적 능력을 蓄積하신 주님께서 한마디 하시니까? 그 능력이 실린 말씀이 적들의 심령에 파문을 일으키고 양심의 가책을 주어 모두 물러가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이 능력을 얻는 비결은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이길 원수는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이기지 못할 환경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는 영력을 강하게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작은 목소리는 기도 없는 사람들의 큰 소리를 압도하는 기적을 낳습니다. 기도로 寬容과 順從과 謙遜과 忍耐를 배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승리합니다. Peace Makerrk가 되어 싸움과 분열과 미움을 화해와 용서와 사랑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기도로 영적 능력을 소유하고 세상과 백성의 慰勞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들이 다 될 수 있기를 所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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