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1:23~26>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肉身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有益하리라. 25.내가 살(거할)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豊盛하게 하려 함이라.
□ 좋은 것보다 有益한 것을 선택하라
삶과 죽음이라는 둘 사이에서 행복한 갈등을 하던 바울은 마침내 육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죽는 것보다 육신에 거하는 삶을 선택하였을까요? 그것은 죽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사는 것이 더 유익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절)"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보다 성도들의 유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자기를 위한 훨씬 더 좋은 일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유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훨씬 더 좋은 일과 더 유익한 것과의 사이에서 더 유익한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좋은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유런데 사람들은 더 유익한 것보다는 더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 보다 내 몸에 무엇이 유익한 것인가를 택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몸에 더 유익한 것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더 먹고 싶어 합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내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적성에 맞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 영혼에 내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감히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언제나 좋은 것만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좋은 것보다 유익한 것을 선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혼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었지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 너희를 위하여
바울은 육신으로 사는 것과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중에 육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바울이 육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였습니까?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4절)"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육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울이 살아가기를 원했던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살기를 원했던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한 번도 자신을 위하여 사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병든 자 눌린 자들을 치유하시며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거보다 복이 있다(행20:35)" 예수님은 분명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은 주는 복이 있고 받는 복이 있는데 더 큰 복은 조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에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말은 축복의 통로를 말합니다. 축복의 통로란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축복의 통로인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그 요셉을 인하여 보디발의 가정에 복을 주셨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는 간수들이 복을 받았고 애굽의 국무총리 되었을 때에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 믿음의 進보와 기쁨을 위하여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희의 유혹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이 말하는 너희의 유혹은 바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말합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25절)"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살아서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하여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가르침 가운데 살아가므로 기쁨이 충만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성장은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의 진보가 이루러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녔어도 말씀을 듣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했습니다.
바울의 삶의 이유는 바로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자신이 감옥에 있지만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빌릴보교회 성들의 믿음의 진보는 자신의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으로 인하여 믿음이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가족들의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함께 있으므로 인하여 가족들의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나로 인하여 내 남편의 믿음이 자라고 아내의 믿음이 자라고 하루가 다르게 자녀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로 인하여 내 남편이 있는 믿음마저 까먹고 자녀들의 믿음이 퇴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삶의 이유는 믿음의 진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을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의 이유도 바로 믿음의 진보가 되어야 합니다.
□ 자랑의 풍성을 위하여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6절)" 바울이 사는 것을 택하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자신으로 말이암아 성도들의 자랑이 풍성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석방되어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 풍성하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은 무엇일까요? 저는 간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석방되어 그들과 함께 있으므로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면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갔더니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였던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간증이 풍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이 나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 풍성해지고 있습니까? 나와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자들의 삶 속에 간증이 풍성해 지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보다 빌립보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선택하였습니다. 바울의 삶의 이유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자랑이 풍성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바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선택하였던 삶의 이유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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