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의 ‘100세 시대’]은퇴남들의 ‘나 홀로 식사’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A 씨는 오전 7시쯤 일어나 운동을 하고, 10시쯤 아내와 늦은 아침 식사를 한다. 그러고 나면 여기저기서 아내를 찾는 전화가 걸려오고 아내는 외출 준비를 시작한다. 결국 점심은 거의 매일, 저녁은 자주 혼자 먹게 된다는 것이다.
A 씨는 생전 들어가지 않던 부엌에 들어가 주섬주섬 먹을 것을 챙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했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는 것도 귀찮아 한두 가지 반찬으로 때우고, 혼자 밥 먹는 게 너무 심심해서 거실에 있는 TV를 켜놓고 밥을 먹는다. 하지만 낮에는 ‘나이 많은 어르신도 보험에 들 수 있다’는 광고가 너무 많이 나와 짜증을 내며 TV를 끈다고 했다.
친구들도 대부분 비슷한 처지다. A 씨가 사는 경기 성남시 분당에는 식당마다 초로의 남자들이 모여 식사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데, 그 자리에선 아내들에 대한 성토가 요란하다고 했다. “다들 이렇게 큰소리쳐요. ‘요즘 여자들 너무 심하다. 자식들이 오면 고기도 구워주고 별걸 다 해주면서 남편은 이렇게 구박할 수가 있나? 봉사활동 한답시고 나돌아 다니는데, 봉사는 밖에서만 하나?’ 물론 집에 가면 다시 조용해지지만요.”
그런데 여느 날처럼 혼자 밥을 먹던 A 씨는 TV에서 혼자 식사하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 특히 칸막이 친 식당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는 심지어 화장실에서 혼자 밥 먹는 대학생도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A 씨는 그런 장면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이러다 혹시 나중에 혼자 남는다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고심 끝에 집 근처 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아버지 요리교실’에 등록하는 결단을 내렸다. 다행히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여럿 있었다. 12주에 걸쳐 된장찌개 끓이는 법부터 전골요리 만드는 법까지 배웠다. 요리교실 다닌다는 얘기에 코웃음을 치던 아내는 어느 날 저녁 A 씨가 차려 놓은 밥상을 보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재밌는 건 그날부터 A 씨의 태도가 당당해지다 못해 아내의 표현대로 ‘도도해졌다’는 점이다. A 씨는 말했다. “전에는 ‘오늘은 언제 들어오시려나?’ 하면서 마누라 눈치를 보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시장 보고, 서점에 가서 요리책 구경하고, 음식 만드는 데 신경 쓰느라 마누라가 나가든 들어오든 관심도 없어요. 오히려 그쪽에서 내 눈치를 봅디다.”
A 씨는 두 가지를 새로 시작했다. 손이 많이 가는 한식 외에 간편하면서도 그럴듯해 보이는 서양음식 만들기에 도전한 게 한 가지, 또 하나는 TV 켜놓고 쓸쓸하게 밥 먹는 친구들을 불러 같이 밥 먹는 ‘명랑한 밥상모임’을 만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는 1인 가구의 증가 추세와도 맞물려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인 가구는 1990년 102만 가구에서 2011년 436만 가구로 4.3배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준의 증가세를 보였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혼자 사는 어르신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혼자 사는 남자 어르신이 늘어나, 201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60대 1인 거주자의 32.2%, 70대의 18.2%, 80세 이상의 13.7%가 남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 1인 가구 남자 어르신의 28.9%가 혼자 사는 데 따르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가사 등 일상생활 문제 처리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일본의 노인인구 비율이 10% 정도로 현재의 우리나라 수준보다 약간 낮았던 1980년대 초반, 일본 작가 사하시 게이조가 쓴 ‘할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이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집안일은 여자만 하는 것으로 알고 83년을 살아온 할아버지가 아내의 죽음 이후 집안일을 배우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책이다. 이 책은 노년의 남자들에게 부엌일을 통한 홀로서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었다.
사실 부엌이란 인생의 어느 시기라도 중요한 곳이다. ‘할아버지의 부엌’ 속 할아버지처럼 아내가 죽은 뒤 홀로 돼서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남자들도 일생 부엌과 친해야 하고 늦어도 중년기가 되면 요리 실력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음식을 만들 수 있어야 식생활의 질도 높이고 인생도 즐거워지지 않겠는가.
밥을 같이 먹는 공동체도 필요하다는 점을 더불어 강조하고 싶다. 농촌 어르신의 삶이 도시 어르신보다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식탁을 나누기 때문이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의 개념도 함께하는 밥상을 매개로 친교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하고만 밥 먹는 시대는 지나갔다. 100세 시대에는 이웃끼리, 세대를 뛰어넘어, 밥을 같이 먹으면서 세상 얘기를 나누는 따뜻한 모임이 필요하다. 식탁을 통해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복지사회’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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