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근심의 해답은 믿음입니다.<2013.09.15/ 제25권 37호>

꿈 꾸는 소년 2013. 9. 22. 16:55

 <요 14:1>

 

 □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금심

 

 "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새찬송가 486) 이 찬송의 가사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심이 있습니다. 자녀, 물질, 건강, 직장생활, 만남, 죽음, 이별 등 정말 많은 근심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근심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또 하나는 세상 근심입니다.(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육적인 근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이 두 근심은 달라도 너무 다른 근심입니다. 우선 근심을 誘發시키는 動機가 다르며 그 열매도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계의 열매를 거두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말 그대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까를 염려하므로 갖는 근심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에게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9:1~2)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마음 속에 있었던 큰 근심과 그치지 않은 고통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은 불신 동족 곧 骨肉 친척들의 구원이었습니다.(롬9:3)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진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동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排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차라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동족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있었던 큰 근심이었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에게 세상 근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만 가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를 부인하며 세상의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속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까?

 

 □ 제자들의 근심과 우리의 근심

 

 제자들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13:21절b) "너희가 나를 따라 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리라"(요13:36)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는 말씀 때문에 근심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한 분을 바라보고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자들이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고생하면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로마 정부로부터 나라를 행방시킬 것이고 그러면 자기들고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자기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에게만 근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사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근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근심과 제자들의 근심을 비교해 보면 제자들의 금심은 그래도 고상한 근심입니다. 적어도 제자들의 근심은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심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한 근심이라기 보다 우리의 욕심으로 말미암는 근심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파도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 왜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는 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도록 놔두어서는 안됩니까? 

 첫째로, 더 깊은 근심 가운데 빠지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직역하면 "너희 마음이 계속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라" "너희 마음이 계속 근심되지 않게 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근심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근심 가운데 더욱 빠지게 만듭니다.

 

 둘째로, 평안의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엡6:7절을 보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평안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 안에 이 평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어떻게 이 평안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의 증거를 위하여서라도 우리는 근심과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百害舞益하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 중에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나 더 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고 근심하다고 해서 생명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어떻게 하면 근심을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 마음에 풍랑이는 파도를 잠재우고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근심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을까요? 근심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마음에 금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심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10절에도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11절에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1절)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신뢰하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벧전5:7절a)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나의 상식을 내려놓고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과 풍랑만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려도 주님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 안에 금심이 사라집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 안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