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이것이 바로 영력이다. ②<2014.01.26/ 제26권 4호>

꿈 꾸는 소년 2014. 3. 12. 19:49

<왕하 6:20~23>

 

 □ 영력을 살리는 능력

 

 엘리사를 잡아 죽이려고 도단성을 에워쌌던 아람의 군인들이 엘리사의 기도대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猝地에 정신이 昏迷해지고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인도를 방다 사마리아 성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머무는 궁궐이 있는 도성입니다. 그들이 사마리아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엘리사가 "이 무리들의 문을 열어서 보게 하소서!"(20절)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람 군대 사람들의 눈이 번쩍 뜨여 사방을 둘러보니 사마리아 도성 안에 갇혀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독안에 든 쥐가 된 것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왕이 그 모습을 보고 이들을 쳐 죽이자고 말합니다.(21절) 이스라엘의 왕은 사로잡은 아람의 군대를 죽이고자 하는 강한 열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치고 싶었으면 "내가 치리이까"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22절을 보면 엘리사는 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들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하는지라"(22절) 엘리사는 그들을 죽이지 말고 다시 "아람의 왕에게로 돌려 보내라"고 말합니다. 2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여 그들을 다시 아람 나라로 돌려 보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력입니다. 진정한 영력은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영력은 언제나 생명을 살립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동편 문지방으로부터 생명의 물이 흘러나와 광야를 거처 사해 바다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겔47:9) 에스겔 37장을 보면 하나님의 生氣인 곧 성령이 임할 때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사라나 지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영력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豊盛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력을 가졌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살리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여리고 죽은 물을 살렸습니다.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도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던 땅에 비를 내리게 함으로 대지를 살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기간 동안 수 없이 많은 자들을 고치시고, 악한 영에 눌린 자들을 자유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전통과 열심으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였고 믿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살리는 자가 있고 죽이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돈이 되어도 인격을 파괴하고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돕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언제나 따뜻한 위로의 말과 중보의 기도로 때로는 희생과 헌신으로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영력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

 

 영력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도단성을 에워쌌던 아람의 군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사마리아 성에 사로잡힌 아람의 군대를 쳐 죽이자고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엘리사는 그들을 죽이지 말고 도리어 물과 떡을 주어 먹고 마시게 한 다음 돌려보내게 했습니다.(22절b) 23절을 보면 아람의 군인들이 이스라엘의 왕이 베푼 많은 음식을 먹고 마신 다음 자기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왕이 위하여 음식을 많이 베풀고 그들이 먹고 마시매 놓아 보내니 그들이 그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23절a)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의 요청대로 음식을 많이 베풀어 먹고 마시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거대한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아니 적군의 군인들에게 거대한 잔치를 베푸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는 a great feast(거대한 축제, 잔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력입니다. 복수하고 미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영력인 것입니다. 엘리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 뭡니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뭡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서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 진정한 선은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바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싸움입니다. 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내 안에 있는 복수하고 싶은 본능과의 싸움입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미움의 영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을 하는 자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누구도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둘째로, 내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내 원수를 갚아 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고 했습니다.

 

 □ 가장 위대한 승리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기 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하여 복수하지 않고 가만히 지내는 것도 힘든데 그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懦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偉大한 승리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영력일 뿐만 아니라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까?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23절b) 죽지 않고 도리어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간 아람의 군대는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사랑을 베풀어 그들을 되돌려 보냈더니 오히려 무서워서 그 이후에는 얼씬거리지 못합니다. 이게 바로 진짜 승리입니다. 엘리사는 진정한 승리가 승리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칼로 찌르고 무기로 항복을 받는 것은 승리하는 것 같으나 또 한편으로 원수를 만드는 일입니다. 만일 아람의 군인들이 죽임을 당하였다면 아람의 왕은 다시 복수하기 위하여 쳐들어왔을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복수의 칼을 갈며 전선에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보복은 보복을 낳습니다. 복수는 한을 만들고 또 다른 원수를 만들어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승이요 가장 위대한 숭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