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11~18>
□ 슬픔 가운데서 몸을 떨며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막달라 마이아는 통곡의 벤치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묘사하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요20:1) 마가는 이 여인을 소개하면서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 내어주신 막달라 말리아"(막16:9)라고 소개합니다. 귀신에 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던 그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팠고, 힘이 들었던 그녀, 귀신에 사로잡혀 미쳐 날뛰는 그를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그녀...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분이 다가오셨고, 그분의 말씀 앞에서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협던 귀신을 떠나갔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입고 새생명을 얻은 그녀는 주님 섬기는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봄이 오면서 거리에는 화사한 꽃들이 피어 핑크 빛 색깔로 뒤덮여 있었으니 그녀의 눈에는 온세상은 잿빛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새들의 노래 소리도 이제는 더 이상 노래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슬픔 가운데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사흘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도 슬픔을 있고 아픔도 몰려옵니다. 은혜를 받은 이후 정말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깊은 슬픔 가운데서 몸을 떨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아픔의 일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요? 주님의 죽음을 생각하면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이쩌면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실 수 있는 것인지... 따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크신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누구 한 사람 나서는 사람이 없이 그렇게 쓸쓸히 고통 가운데서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면 하나님도 원망스러웠습니다. 통곡의 벤치에 앉아 몸을 떨며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 통곡의 벤치 곁에 서 계시는 분
그런 사실을 전하면서 오늘 말씀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줍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부활 소식을 전하는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부활의 아침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 대해 기록합니다. 그런데 요한이 전하는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전해 줍니다. 11절 말씀,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마리아가 울고 있었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통곡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답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라이오'는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슬픔의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큰소리로 통곡하는 울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억울하게 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울부짖는 이 여인의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이 말씀을 전하는 요한은 이러한 눈물의 현장을 전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더 전하고 있습니다. 14절, 울고 그 여인 '뒤에', 즉 예수님이 서 계셨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한없이 통곡하며 울고 있는 그곳에 말없이 함께 계신 분... 함께 울고 계시는 분... 바로 그 분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슬품과 분노로 가득했던 여인도 함께 울어주시는 주님 때문에 일어셨습니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주시는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고,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에 서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분명 꽃을 시들었습니다.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팠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슬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꽃이 시들었다고 슬퍼하고 있었는데 부활의 향기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소망의 향기로 넘치고 있었습니다. 몇 주일 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통곡의 벤치에 앉아 울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2:25)
□ 이제 너는 일어나
그렇게 마리아를 위로하여 일으켜 세우신 주님, 부활 신앙으로 일으켜 세우신 주님, 그분의 現存을 확인시켜주시고 부활의 소망을 불어 넣어주신 주님... 그분께서는 일어선 마리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 이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가서 이 사실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꽃이 시들었다고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향기, 소망의 향기를 불어넣어주신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울고 있는 자들을 위해 그를 보내고 계십니다. 가서 아직 통곡의 벤치에서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울고 전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을 잡아 주며 내 사랑을 좀 전해주어라. 그러면서 주님께서 확인시켜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무덤에서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신 분이 우리 아버지이고,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고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죽음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인생이라는 초원을 걸어갈 때 죽음은 곳곳에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뒤에, 오른 편에, 앞쪽에, 흔들리는 들풀이 있는 곳에도 죽음은 도라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죽음에 공격을 받아 시들고 쓰러진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그런 곳으로 보내십니다. 갈릴리의 한 언덕에서 예수님은 슬픔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哀痛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에게 무슨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痛哭하는 자들에게 무슨 축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어찌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들에게 喝采를 보내시는 것입니까? 애통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새날을 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새날, 하나님이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온몸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새날이, 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곁에 없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애통함의 벤치, 그 통곡의 벤치에 앉은 자들과 함께 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통곡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보게 됩니다. 아픔의 자리에 서있지만 그분의 통곡 소리를 듣는 사람, 우리에게 부활의 향기를 불러주시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입니다. 눈물의 역사입니다. 상처의 역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에는 상처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상처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주님은 그 상처를 잃어버리지도 않으셨고, 지워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상처들을 입은 채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가지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날 디베랴 바닷가에서 시장한 베드로를 위해, 실망과 좌절로 피곤한 베드로를 위해 친히 모닥불을 피우시고 朝飯을 준비하시던 주님의 손에 있는 십자가의 傷痕을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우리도 보고 있습니다. 부활은 그 상처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픔과 상처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셔서 통곡의 벤치 뒤에서 말없이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가 상함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분께서 상처를 입으심을 우리는 가슴에 깊이 패인 내 상처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통곡의 벤치에서 울고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주님은 부활의 향기가 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서 그것을 좀 전해주지 않겠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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