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2:13~15>
□ 완전한 정복
이 세상엔 완전한 제품도 없고 완전한 사람도 없고 완전한 가정도 완전한 직장도 없습니다. 勿論(말한 것도 없이) 완전한 교회도 없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것 같지만 부족함이 있고 부작용이 있고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완전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면 충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기에 완전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럽혀진 죄인도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죄를 사함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실패한 사람도 복음의 권세와 능력을 알면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저주를 끊고 자유케 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 다른 복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완전한 복음에 뭔가를 첨가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완전한 복음에 뭔가를 더 추가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절b)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도 믿고 육체의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더불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캐토릭에서 주장하는 연옥도 따지고 보면 다른 복음입니다. 연옥이란 천국에 이르기 위해 영혼이 정화되어 다듬어지는 공간을 말합니다. 캐콜릭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연옥에 들어가서 일정기간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한 심판을 받고 정화의 단계를 거쳐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완벽하게 치루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완벽하게 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연옥을 말하는 것은 십자가의 피를 부정하는 것이요 완전한 복음을 부정하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또 최근에는 바코드 칩을 666으로 이야기하면서 발세에는 그것을 받지 말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믿고 바코드를 받지 않아야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완전하고 충분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째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심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13절) 우리는 예수를 믿기 전 범죄와 무할례로 죽어 있떤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어 있었던 우리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리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어 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죽어 있더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죄는 사라지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받드시 그 지은 죄에 대하여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완벽하게 치루셨습니다. 죄값은 수치이고 刑罰이고 죽음인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수치와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완벽하게 치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못 박으심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거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14절) "우리를 거스르고 분리하게 만드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란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법조문으로 쓴 증서라고 표현하였을까요? 율법이 우리 인간에게 율법적 행위와 온전한 이행을 요구하는 법적 채무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빚 문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그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타락한 죄성을 가진 우리 인간들은 그 율법을 지켜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에 이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르 거스르고 분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는 율법을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더 이상 그 율법이 우리 죄를 정죄하거나 고소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못을 박으셨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더 이상 정죄하거나 고소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고정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힘을 당하실 때 우리를 향한 율법의 요구도 못 박힘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그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율법의 정죄가 없습니다.
셋째 십자가에서 승리하심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15절)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가는 凶惡한 죄인들을 處刑하는 懲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다는 것은 가문의 羞恥이고 인생의 실패이고 가장 悲慘한 詛呪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승리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바로 악한 천사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迷惑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서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말은 무장해제를 키겨 수치를 당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 모습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행진의 모습과 같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그의 권세를 무장해제 기켜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치를 당하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온 세계와 萬邦에 드러내셨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승리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기셨느니라는 말이 과거완료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이겨 놓으싡 영적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셨다"는 말은 승리한다는 뜻과 함께 승리를 慶祝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모든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아와 그들을 熱烈히 환영하여 함께 승리의 感激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의 역시 십자가의 승리를 기뻐하며 그 승리의 감격을 함께 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함께 노래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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