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3:7~10>
□ 십일조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이유
최근 들어 한국교회 안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십일조는 율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에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새 언약의 백성들인 우리는 십일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은 폐지되었습니다. "법조문으로 된 誡命(종교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의 율법을 폐하셨으니"(엡2:15절a)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할례를 받지 않고 피의제사를 드리지도 않습니다. 레위기에 言及된 음식의 規例를 지키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① 십일조는 율법 이전부터 시행되었다.
그런데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으로 주어지기 전부터 족장시대부터 시행되어 왔습니다. 창14장을 보면 아브람이 소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댁에게 바칩니다.(창14:20) 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입니다. 창28장을 보면 형이 낯을 피하여 도망치던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 축복의 약속이 말씀을 듣고 조건적으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誓願합니다. 야곱 역시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십일조를 서원하였습니다.
② 율법은 폐하였지만 그 정신과 그 원리는 남아 있습니다.
設令 십일조가 율법이고 그래서 폐하졌다 할지라도 그 율법의 원리와 정신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이 오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豫表하는 모든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율법이 폐하여졌기에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는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구약의 피의 제사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바라 볼 수 있고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를 행하지 않지만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십일조 역시 마찬자기입니다. 십일조가 율법이므로 폐하여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드리기를 원했던 율법의 정신과 원리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도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적으로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薄荷와 茴香과 芹菜와 같은 향료들의 십이조까지도 또박또박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며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들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23) 무슨 말입니까? 철저하게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게 드리는 것도 행하고 정의롭고 긍휼히 여기며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만 그리면 법을 다 지킨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십일조만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 穩全한 십일 조
본문을 보면 萬軍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백성들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면서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7절) 그러자 백성들이 반응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야 합니까?" 그때 주님은 강력한 어조로 십일조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다" 그리고 10절에서 온전한 십일조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10절a) 그렇다면 온전한 십일조는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청지기적 신아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聖物이라"(레27:30절a) 그렇습니다. 지금 내게 있는 재물이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졌다 할지라도 그 재물의 원주인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달란트 사랑하는 자녀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것들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 일 뿐입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없이 복만을 받기 위해 드리는 십일조는 온전한 십일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의무가 아닌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립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십일조는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은 십일조를 말씀하시면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복만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것은 정말 유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내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절대로 강요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된 새 언약의 백성들인 초대교회 성도들은 구약의 십일조를 능가하는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강요나 명령이나 의무감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 나를 시험하여 보라
그런데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나를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드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10절)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은 불신앙이기에 성경이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일조와 관련된 말씀을 주실 때에는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나를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시면서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까요? 우리 안에 있는 탐욕 때문입니다.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골3:5)고 말씀하고 있고 우리 예수님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절b)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든지 아니면 재물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며 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여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저와 여러분이 탐욕의 지배를 받으며 비참하게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나를 시험하여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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