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5:12~13>
□ 同族의 背信
인류의 역사는 배신의 역사입니다. 에덴동산으로 부터 시작된 배신이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손도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블렛셋 사람으로부터만 배신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민족, 동족으로부터도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를 쳐들어온 이유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10절b) 한 마디로 삼손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보호해주기 보다 도리어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네가 왜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하여 우리를 힘들게 하였느냐?" 삼손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기 위함"(12절a)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삼손은 "너희가 내 목숨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내가 순순히 너희에게 결박당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가겠다"(12절b)라고 말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죽이지 않고 단단히 결박만 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주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13절a)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유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삼손을 결박하여 바위 틈에서 끌어내었습니다.(13절b) 삼손은 이렇게 자기 동족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였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壓制에서 구원하기 위해 사사로 부르심을 입은 삼손을 자신들 스스로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져준 것입니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하에 일본 사람들을 괴롭히고 일본 사람들을 죽인 독립투사를 스스로 붙잡아 결박하여 일본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돈과 명예와 권력 때문에 동족을 배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손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동족들에게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 동족의 배신이 주는 교훈
첫째로, 배신자는 가까이 있다.
삼손을 배신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동족입니다. 어린 시절 한 마을에서 형님 동생하면서 지냈던 자기 동족입니다. 그 삼천 명의 사람들 중에는 친구도 있었을 것입니다. 一家親戚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데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삼손을 잡아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일본 만화 책 가운데 오다기리 호타루가 지은 '배신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배신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배신자는 멀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했던 사람도 보십시오. 가장 예수님 곁에 있었던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금고를 맡았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배신을 멀리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배신의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관심이 내부를 향한다.
우리는 동족의 배신을 보면서 영적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 관심이 언제나 내부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유다 사람들은 자신을 압제하고 있는 블레셋과 싸우기보다 블레셋과 외롭게 싸우고 있는 삼손을 잡아 넘겨 주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영적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자는 언제나 그 관심이 언제나 내부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패배주의에 빠지면 모든 에너지가 내부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패배주의에 빠지면 주된 관심이 밖이 아니라 내부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肢體들끼리 싸움니다. 지체들을 향하여 "당신 때문"이라며 서로 비난을 하고 정죄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마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끼리 싸웁니다.
그래서 적과 아군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유다 사람들이 삼손은 유다 사람들이 자기의 싸움의 대상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적과 아군을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잡으려고 온 유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野俗하고 마음이 아팠지만 그들의 손에 순순히 결박을 당하여 끌려 나아갔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내부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무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부르사 다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의 대사로 세상에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연약함을 이해하라.
삼손은 유다 사람들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여 결박을 당했습니다.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13절b) 자신을 잡으러 온 유다 사람들을 나무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유다 사람들과 싸우지도 않았습니다. 힘이 없어서 일까요? 두려워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보복이 두려워 자신을 잡아 넘기는 일에 앞장선 자기 동족의 연약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마음은 원치 않지만 자기를 잡아 넘김으로 블레셋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그 연약함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약한 자기 동족을 위해 순순히 스스로 결박을 당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이가 아니요"(히4:15절a) 동정하신다는 말은 그 어려움을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함께 느끼시고 이해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배신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굶주림의 고통이 무엇인지, 버림받음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 역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도우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우리의 약함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아니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강한 척 하지 마십시오. 연약하여 넘어졌으면 넘어진 모습 그대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삼손은 자신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유다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형제와 자매의 연약함을 알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아니 바로 잡으려고만 하고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죄는 미워했지만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이해하셨듯이 우리도 마음은 원이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쉽게 넘어지는 연약한 지체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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