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보라! 지금이다!<제27권 18호/2015.5.3>

꿈 꾸는 소년 2015. 5. 9. 10:48

 <고후 6:2>

 

 □ 꿈만 같은 구원의 은혜

 

 바울은 꿈만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引用하여 言及하고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2절a)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서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고통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해방시키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완전히 회복시켜주실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의 때에 구원의 날에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淸算(①서로 간에 채무·채권 관계를 셈하여 깨끗이 해결함. ②과거의 부정적 요소를 깨끗이 씻어 버림.)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말이 그렇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 앉아 예루살렘 시온을 기억하여 울었다고 했습니다(시137:1). 그런데 이렇게 설움을 받고 고통을 겪는 자들이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청산하고 예루살렘 시온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바벨론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면 꿈만 같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꿈만 같은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투쟁을 하고 노력을 하여 이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 그래서 바벨론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만한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의 때에 구원의 날에 세계 최강 바벨론을 페스리사 고레스왕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레스 왕은 칙령을 내려 70년 동안 바벨론으로 끌려와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오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경험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구원도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든지 아니면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든지 어떤 형태로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보라, 지금이다.

 

 이렇게 꿈만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설명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를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절b)라고 宣布(세상에 널리 알림.)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어는 때를 말할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재림까지의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은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시대를 은혜의 때, 은혜의 시대라고 부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일에 있어 그 어떤 제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의 때에는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본문이 말하는 지금은 개인적으로 보면 '지금 이 순간'을 말합니다. '지금(just now)'이라는 말은 숨을 쉬는 이 순간, 살아있는 이 '刹那(①어떤 일이나 사물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② <불교> 매우 짧은 시간.)'를 말합니다.나의 맥박이 뛰고, 심장이 고동치고, 손발이 움직이고, 두 눈이 깜박이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 신앙의 時制는 지금

 

 신앙의 시제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의 시제가 바로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시제는 항상 현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우리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1:4)로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하나님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시제도 바로 지금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현장은 언제나 "여기"이고 신앙의 시제는 "지금"입니다. 영어로 "here and now"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지금의 종교입니다. 히브리서 3: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頑固(융통성이 없이 올곧고 고집이 세다.)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여기'라는 신앙의 현장과 '지금'이라는 시제가 정말 중요합니다. 신앙의 현장은 언제나 지금 내가 있는 그곳입니다. 다른 곳이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서 잘 해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있는 그 곳에서 지금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시간이 지나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중에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지금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 마귀의 戰略(정치, 경제 따위의 사회적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책략)

 

 그런데 마귀의 전략은 언제나 "다음에"입니다. "건강해지면" "현편이 좋아지면" "시간이 나면" 이것이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할렐루야, 아멘이 떠나지 않지만 지옥에는 걸걸걸 하는 소리가 떠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도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예수 믿을 걸, 나누어주는 삶을 살걸, 다니엘 세이레 기도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을 걸, 사랑하고 용서할 걸... 지옥이란 곳은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영원히 후회하는 곳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다음으로 미루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충성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이 오기 때문입니다.

 

 □ 자녀의 영적교육도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가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들에 대한 영적교육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입니다. 그래서 잠22:6절을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부모된 우리는 내 자녀들에게 무엇을 마땅히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잠1:7).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本分(①사람이 저마다 가지는 본디의 신분. ②의무적으로 마땅히 지켜 행하여야 할 직분)임을 가르쳐 이 시대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삶을 살게 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탐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가르쳐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해답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세상의 골리앗을 이길 수 이길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