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1:19> 이것이 너희의 懇求와 예수 그리스도의 聖靈의 도우심으로 나를 救援에 이르게 할 줄 아는 故로.
□ 救援이 필요한 사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그 구원은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죄 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많은 경우 疾病에서 고침받은 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9:22). 뿐만 아니라 위험한 상황이나 상태에서 救出되는 것, 穩全케 되는 것, 가난에서 解放되는 것 등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 사함을 받는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관련된 넓은 의미로서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지금도 우리에게 필요하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너희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確信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어떤 구원입니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혼의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釋放을 말합니다. 그래서 표준 새번역에서는 '내가 풀려나리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 성경 NIV, RSV, 뉴킹제임스 버전 등도 구원이라는 말을 Salvation이라고 하지 않고, 석방이라는 Deliveranc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좁게는 영혼의 구원으로 넓게는 생활 속에서의 구원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구원이 필요합니다. 아니 구원받았기에 더 많은 구원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 무엇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가?
그러면 어떻게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 治癒되고 온전케되고 회복되는 구원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祈禱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 故로(19절)" 여기서 "너희의 간구"는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가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確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누구보다 기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을 쓸 때마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한 번도 자기가 모든 것을 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도들에게 中保의 기도를 付託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偉力을 아는 자만이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붙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使徒 중에 사도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보면 사람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어만 놓아도 병이 낳고 귀신들이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도 언제나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모든 문제를 解決하겠다는 것은 一種의 영적 驕慢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우리는 계속적으로 구원을 經驗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구원을 경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로 하여금(누구를 시키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일을 볼 수 없습니다. 기도없이는 어떤 구원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구원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치유와 회복의 구원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자신이 기도의 무릎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그리고 함께 모여 기도하십시오. 기도 없이는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막9:29).
둘째로, 聖靈의 도우심입니다.
바울은 지금 내가 감옥에 갇혀 있지만 너희의 간구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감옥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昇天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셨던 그 일들을 성령께서 계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치시고 傳播하시고 치유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保惠師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떤 구원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저희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요14:16). 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까? 우리의 軟弱함을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롬8:26). 우리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참으로 약합니다. 질병에도 약하고 誘惑에도 약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유혹 앞에 넘어졌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도 유혹 앞에 넘어졌습니다. 이것을 보면 완전한 인간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들 중에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완전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딛고 사는 한 우리 인간은 연약이라는 십자가를 벗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와 동행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연약하지 않다면 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겠습니까? 우리가 연약하지 않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어떻게 우리를 도우십니까?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으로 도우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신 보혜사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의 무릅을 끊고 성령으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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