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1:21~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有益함이라. 22. 그러나 萬一 肉身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擇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이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에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아무리 殘忍한 犯罪를 저지른 사람도 자신의 죽음만큼은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들어보면 사형수들 亦是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사형수들이 얼마나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사형수들이 있는 간방에는 바퀴벌레도 죽이지 못한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내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킬 수 있다면 내 소유의 절반을 주겠소"라고 외쳤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할까요? 그것은 죽음이 바로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한 사람의 범죄로 죽음이 우리 가운데 들어와 왕 노릇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롬5:17). 여기 나오는 한 사람은 바로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을 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拒逆하고 범죄하므로 죽음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얼마동안 살다가 죽을 존재로 지으셨다면 사람들은 아침을 맞이하듯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까요? 죽음이 바로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 生과 死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 生과 死 그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23절a)" 여기서 말하는 둘은 바로 생과 사를 말합니다. 사느냐 죽느냐를 말합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생과 사라는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씁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내 곁에 가까이 있씁니다. 우리의 생과 사는 한 호흡지간에 달려있습니다. 숨 한 번 들이마셨다가 못 내쉬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뿐이니라(삼상20:3)'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생과 사의 기로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살아서 복음 사역을 계속하고자 하는 것과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욕망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는 것도 너무 좋고 죽는 것도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끼어 고민하고 갈등한 것입니다. 이런 갈등은 정말 행복한 갈등입니다. 저는 이 바울의 행복한 갈등과 고민이 우리 오륜의 모든 지체들의 갈등과 고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 죽는 것도 너무 행복하고, 사는 것도 좋고 죽는 것도 너무 좋아 무엇을 택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고민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 죽음의 有益
이렇게 사는냐, 죽느냐 둘 사이에 끼어 고민하던 바울은 마침내 사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합니다. 세상에 사는 것보다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23절). 21절에서도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유익하다고 말하고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 왜 죽음이 좋은 일인가?
그러면 왜 바울은 죽음의 유익을 말하였을까요? 아니 죽음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하였을까요?
첫째로, 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때문이다.
"내가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23절)" 세상을 떠나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죽음이 뭡니까?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서"라고 할 때 이 "떠나서"라는 단어는 駐屯해 있던 군대가 막사를 걷고 이동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내 영혼이 육체라는 텐트의 장막을 벗고 내 몸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은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안에는 如前히 죄성이 남아 있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어서 그것 때문에 실족하고 넘어진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내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지 못하여 넘어질 때마다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내 영혼이 육체의 장막을 벗어나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자유를 찾은 기쁜 새처럼 모든 악으로부터, 모든 시험으로부터, 모든 죄책감으로부터, 모든 연약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神聖한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벧후1:4).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게 되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것을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3:2). 우리가 그와 같이 된다는 말은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성화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마지막 완성은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온전히 주님을 닮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을 유익하다고 말했고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죽음은 몸과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23절).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樂園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눅23:43). 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居處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迎接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아무리 좋아도 주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滅絶(멸망하여 아주 없어짐.멸망시켜 아주 없애 버림.)이 아닙니다. 인생의 逃避處도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 죽음은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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