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2010.7.4. 제권22권 28 호>

꿈 꾸는 소년 2010. 7. 17. 12:55

☞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

 

 □ 나의 懇切한 期待와 所望

 

 인간은 누구나 이루고 싶은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기에 힘들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산 다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가 처하여 있는 상황과 상관없이 내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던 소망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20b)"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 있고 언제 皇帝에 의해 斬首刑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事實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로마 교회 성도들을 동원하여 황제에 嘆願書를 제출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믿었기에 그는 황제를 崇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구차히 면하기 위해 신앙의 양심을 져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日常의 모든 삶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제자훈련을 받고 섬기는 일에는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일상의 삶에는 추한 삶을 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일에 부끄럼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완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모든 일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고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주요한 것은 모든 일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요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고 교회를 떠나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모습이 꼴보기 싫어서 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과 밖에서의 삶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감옥에서 탈출이 아니었습니다. 구명운동을 펼쳐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출세입니까? 성공하는 것입니까? 비록 가난할 지라도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노니(20절c)" 여기서 '존귀하게 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확대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현미경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확대하여 보여 주듯이 자신의 삶과 순교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 앞에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가장 존귀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이 말은 복음의 증거를 말합니다. 바울은 기도를 부탁할 때마다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기 위하여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가장 존귀하게 되는 것은 바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담대히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몸에서 가장 존귀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인생이 삶의 목적이며 삶의 이유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이셨습니다(골3:4). 바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셨습니다(고후4:7). 한 마디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의 목적이었고 삶의 이유였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이유이고 삶의 목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만남으로 삶의 이유를 알게 되었고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썩어지지 않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보여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 사는 것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有益함이라(21절)"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바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迎接하는 일은 쉬운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려면 내가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되려면 내가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말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을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을 내가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살면 따분할 것 같습니까? '이렇게 살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지'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나 바울의 행복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結縛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행26:29)"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라고 고백했습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 우리 모두 바울처럼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