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후반 일본에서 공부했던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최근 도쿄 출장길에 사회분위기가 지나칠 정도로 침울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점의 사회학 코너에는 ‘불평등 사회 일본’, ‘빈곤사회 일본’과 같은 제목의 책이 서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지하철과 공원 곳곳에는 노숙자가 넘쳐났다. ‘20년 전 유학왔던 그 일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김 교수는 “1980년대에 만났던 일본인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거리의 네온사인은 화려했고 손님을 태운 택시가 줄지어 다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제적 격차도 크지 않았다.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바로 일본이라는 자신감 섞인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의 몰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때가 아니다. 최근 한국의 중장기 경제전망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금부터라도 일본과 다른 길로 가지 않으면 한국도 침체하는 일만 남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에 발목이 잡히고 시대 흐름에 맞는 패러다임 변화에 실패하면서 ‘잃어버린 20년’의 터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이 10년 후 고스란히 한국의 모습이 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 한국과 일본, 아홉 가지가 닮았다
국내의 일본전문가 6명은 2000년대 들어 한국과 일본 사회가 닮은 점으로 △저출산 고령화 △비정규직 근로자 증가 △양극화의 심화 △낮아지는 잠재성장률 △회사 중심 사회 △청년들의 좌절 △기존 성장모델 고수 △창의적 제품 부족 △혁신형 창업 부족 등 아홉 가지를 꼽았다.
이들 9개 현상은 공교롭게도 ‘침체된 일본의 현 주소’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소비 침체로 내수가 살아나지 않으면서 성장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1955∼1970년대 초까지 연평균 10%씩 성장했던 일본은 1990년 이후 약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여기에는 저출산 고령화,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청년들의 좌절 같은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제조업 강국에만 머물다 보니 일본 경제의 미래도 밝지 않다. 공산품 가격은 기술 발전에 따라 계속 떨어지는 데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이 제조업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 침몰의 시작은 저출산 고령화
저출산은 ‘생산연령 인구의 감소→경제활동 및 소비시장의 위축→고용환경의 악화→세금 증가 및 생활기반의 악화→저출산의 심화’라는 악순환을 낳게 한다. 전체 경제의 파이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1995년 생산가능연령 인구(15∼64세)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2005년부터는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미 일본의 식품 의류 유아 및 아동용품 시장은 인구 감소로 축소되고 있다.
한국은 2017년부터 생산가능 연령 인구가 줄어든다. 하지만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올해 전체 인구에서 생산가능 연령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일본이 63.9%, 한국은 72.9%지만 매년 격차가 줄어들어 2050년이 되면 일본(51.8%)과 한국(53.0%)이 비슷해진다.
고령화 역시 경제활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100세까지 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노인들이 지갑을 닫기 때문이다. 이른바 ‘장수(長壽) 리스크’다.
일본은 2006년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 중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현재 한국의 노인인구 비율은 11% 정도다. 하지만 2018년에는 노인인구가 전체의 14%를 넘으면서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2026년에는 일본처럼 초고령사회가 된다. 205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령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1990년대에만 137조 엔(약 1863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부었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선진국 중 가장 많은 경기대책비용(2008년 GDP 대비 14.8%)을 투입했으나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제조업+α’의 길 찾아야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 와세다대 금융경제대학원 교수는 1970년 이후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를 분석했다. 2008년 브라운관 TV의 가격은 1970년의 9%에 불과했고 나머지 공업제품의 가격도 대체로 1970년대에 비해 약 10분의 1 수준이었다. 반면 같은 기간 서비스 가격은 5배 정도 올랐다. 제조업으로 이익을 내기가 그만큼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노구치 교수가 밝힌 수치는 제조업 강국 일본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제조업에만 머무른다면 위기에 강할 수는 있겠지만 한 단계 도약해 큰 폭의 경제성장을 이루기는 힘들다. 게다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일본의 제조업은 허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유훈 국회 예산정책처 연구원은 “일본도 워크맨 신화를 만들었지만 워크맨은 단순 제조품이어서 금방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있었다”며 “미국의 아이패드, 이탈리아의 페라리 같은 제품이 나올 수 없는 구조가 일본 제조업의 한계”라고 지적했다.
이런 한계는 한국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도 일본과 같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을 거쳐 지식기반 경제로 가는 산업발전 흐름을 보였다. 하지만 지식기반 경제의 경쟁력은 아직 약하고 제조업의 수준도 일본보다 떨어진다.
이우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이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일본처럼 침체할 수도, 아니면 계속 성장할 수도 있다”며 “이제 한국은 강한 제조업에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을 접목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도쿄=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 日 “한국의 과감함-스피드 부럽다”… 일본과 다른 한국의 자산 ▼
한국에서는 “침체하는 일본을 닮아간다”는 우려가 커져가는 반면 요즘 일본 사회는 “왜 우리는 한국처럼 못 하느냐”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달 열린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가 끝난 뒤 일본 언론들은 “한국의 과감함과 스피드에 일본의 누구도 대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11월 14일자 마이니치신문) 같은 보도를 쏟아냈다.
G20 정상회의 개최를 먼저 추진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2008년 제1차 워싱턴 정상회의 직후부터 당시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총리는 “제3차 정상회의를 일본에서 개최하고 싶다”며 한국의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중의원 선거 등 국내 정치 상황이 꼬이면서 G20 개최를 포기했고 그 기회를 한국이 어부지리로 얻었다.
한국은 비(非)G7 국가 최초, 아시아 지역 최초의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제부처의 고위 관계자는 “일본 경제 관료들을 만나면 한국을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잦은 의회 해산과 내각 교체로 G20 같은 대형 국가 프로젝트나 중장기적인 정책을 힘 있게 실천해 나가기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작성한 ‘일본 산업의 현상과 과제’란 보고서에도 “한국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지 않게 포함돼 있다. 이 보고서는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확보해내는 (한국의) 민관 대응체제를 배워야 한다”고 적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전력 같은 국영기업의 원전 해외 수주를 정부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미국 프랑스보다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또 “일본은 자국 시장에 쟁쟁한 기업 수가 너무 많아 ‘국내 소모전’이 너무 심하다”며 “한국 기업들은 한국 시장을 발판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신속한 투자전략을 실천한다”고 분석했다. 이는 두 나라의 위기 대응 처방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일본은 1985년 엔고 위기 이후 공공투자를 중심으로 내수 확대에 집중하는 바람에 과잉공급 구조를 낳은 반면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과잉 다각화를 해소하고 산업의 집약화에 주력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시각이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한 전직 최고경영자(CEO)는 “일부 일본 대기업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도입해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면서 과감한 투자 대신 단기성과에 집착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를 틈타 한국의 오너 및 그룹 경영 체제가 경쟁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추락세’라면 한국이 ‘추격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해마다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순위에서도 올해 처음으로 한국(23위)이 일본(27위)을 제쳤다. 일본은 1990년에는 세계 1위였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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