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2] 2008.

괴로움이 기쁨이다 / 김은호 목사. 제30권 50호. 2018.12.16.

꿈 꾸는 소년 2019. 7. 13. 20:31

 ☞ <골 1:24>


 ♣ 괴로움이 기쁨이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꾼으로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24절a)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이 복음 때문에 받았던 고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복음 때문에 받았던 괴로움이 곧 기쁨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로새 교회를 직접 개척하여 세우거나 그곳에서 목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 지역의 사람들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으르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동일한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 아세아와 유럽을 여러 차례 전도 여행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고후11:23~27) 그리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은 고로새교회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모든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맏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절a) 이 세상에 누가 괴로움을 기쁨이라고 말합니까? 현대인들은 고난이라는 말조차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을 기쁨이라고 말하고, 고난을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도들 역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을 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합당히 여기며 기뻐하였습니다.(행5:41) 우리 예수님 역시 "나로 말이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1~12a)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경우 고난을 복라고 말하고 고난을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고난과 기쁨이 함께 사용된 구절이 무려 18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고난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고난을 복이라고 말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1:29)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 고난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 왜 괴로움(고난)이 기쁨인가?


  첫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받으신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고난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속죄 사역을 위하여 받으신 고난은 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기 위해 받으신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합니다. 


   ②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왜 바울은 "그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과 교회는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2:27; 골1:18) 예수를 믿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어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받는 고난은 곧 주님이 받으시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받은 고난을 당신의 고난으로, 나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나의 괴로움을 당신의 괴로움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괴로움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더ㅚ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 주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다면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입니다. 


 ③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런데 왜 바울은 자신이 육체로 겪는 여러 가지 힘든 일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까? 자신이 받는 고난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이며 자신이 기쁨으로 그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나태내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주님과의 친밀함

 왜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받는 괴로움(고난)을 기뻐해야 합니까?

 그것은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며 주님과의 친밀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는 자로다 영과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왜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치욕을 받는 것을 복이라고 말했을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고난 받는 자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지 않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 나와 함께 계심을 더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위로를 더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잔을 마시면서 주님의 어루만지심을 경험합니다.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인생이 밤을 만나고 인생이 풍랑을 만나면서 들려오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풍랑 인영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라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만날 때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형통할 때, 평탄할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태신앙이 아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인생의 밤을 만나고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한숨과 탄식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생의 높은 고지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낮을 자리, 흑암 속 깊은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