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當場이라도 아버지, 하고 부르면 아버지는 그 선한 눈빛으로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실 것 같아 "아, 아버지"라고 소리 내어 불러봅니다. 아버진 이렇듯 세월 속에서 이 아들을 바라보고 계실 것만 같습니다.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했을 아버지 때의 서신 格式에 비하면 無禮를 저지르는 것 같아 살짝 걱정도 됩니다.
그날 뜨거운 炎天에 달구어진 낙동강 白沙場엔 動亂의 狂風이 물아쳤고, 結局 아버진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그렇게 떠나셨지요. 70년 세월, 이젠 눈물마저 말라버려 아버지를 부르는 불효자의 가슴은 그저 먹먹할 따름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하늘로 흘러가듯 아버진 나의 記憶 속을 그날로부터 只今껏 흘러가고 있습니다.
骨髓에 사무친 同族相殘의 悲劇 六二五 그날이 올해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非命에 떠나신 아버지를 그리며 小子가 늦게나마 筆을 든 것은 최근에 아버지의 젊음을 송두리째 荒廢化시킨 일제강제징용 현장을 目擊했기 때문입니다. 늦긴 했지만 부산에도 일제강제징용 역사관이 들어섰고 저는 그곳을 둘러보면서 끊어오르는 憤怒를 억누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다 마침 家庭의 달을 맞아 '五月에 쓰는 편지'도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볼 수 있는 機會를 저에게 저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서른 中般에 떠나신 아버지에 比하면 일흔 밑자리에 이르도록 生을 享有한 어머닌 天壽를 제대로 누렸다 할 수 있을까요. 구날 어깨높이만큼이나 깊은 강물을 건너느라 피라봇짐을 백사장에 몽땅 버리고 맨몸만 건너야 했으니 구걸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되어었다고 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避亂民들 中 가장 딱한 處地라는 어머니의 懇曲한 呼訴가 먹혀 이 아들 혼자만 國軍이 건너는 말에 올라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날로부터 우린 헐벗고 굶주린 채로 경북도 남단 청도까지 南下했고, 피란에서 돌아와서도 어머닌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시골 部落을 찾아가는 行商애 매달려야 했습니다. 잿더미로 변한 집터에 세운 움막에 돌아왔지만 피란길에서 極度로 지쳐 초롱초롱한 눈망울마저 퀭했던 세 살짜리 동생 문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대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보릿고개 모진 세월 견뎌내면서도 어머닌 누나와 이 아들이 挫折할까 봐 아버지께 들었을 홋카이도와 히로시마 탄광 强制勞歷 苦生談을 자주 풀어놓고 했었지요.
그날 폭격기가 백사장을 붉게 물들이던 순간 아버지 최후를 곁에서 지켜준 사촌형님도 이제 그쪽 세상에서 만나셨겠지요. 형님은 여든 지나 떠날 때까지 아버지를 대신해 저를 챙겨주었고, 이 아들이 가정을 이룰 때까지 아버지 祭祀를 모셨으니 아버지는 진작부터 그 고마움도 알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 아버지가 만났더라면 누구보다 사랑을 주셨을 며느리도 일흔은 넘긴 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다. 천주교 信仰이 며느리로부터 우리 가정에 왔고 아버지 忌日마다 제사와 聖堂 煉미사[慰靈 missa]에 精誠을 쏟아온 며느리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낳아주신 자식으론 누나와 저만 이승에 남았습니다. 작년 아버지의 기일 뒷날엔 둘이 함께 북한산을 오르며 아버지를 그리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지켜보셨겠지요. 어느새 여든을 훌쩍 넘긴 아버지의 딸이지만 누나는 피란 때부터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아들인 小子는 지금도 아버지로 因해 일본을 怨讐의 나라로 벼르는데, 딸은 그 나라를 드나드는 보따리장사로 생활터전을 잡았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요? 그러고선 누나는 보란 듯이 그 나라 수도 중심지역에다 집까지 마련했고 결혼해서 줄곧 살았던 서울 서대문에다가도 반듯한 상가건물까지 이루었으니 苦生 끝에 樂이 온다는 말이 들어맞은 것 같습니다. 히로시마에서 낳으신 이 아들과는 달리 딸은 極限의 땅 훗카이도에서 태어나 생활력이 그만큼 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께 처음 올리는 글이라 궁금해하실 손자들 얘기도 들려드리겠습니다. 누나는 딸 셋 밑에 아들을 두었지만, 그 아들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중 身病울 얻어 세상을 떴습니다. 이제 예순에 이른 큰딸은 젊은 날 夫婦가 말레이시아로 移住했고 밑에 딸들도 미국에 定着하여 전문직에 從事하고 있어서 가끔씩 歸國할 때나 저를 찾아오곤 합니다. 親孫女는 이제 쉰에 들었고, 그 바로 밑인 孫子와 서로 가까이서 살고 있습니다. 손자는 아버지와 판박이로 빼닮아 가끔 잠든 얼굴을 보면서 참 神寄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얼굴 모습에다 190cm에 달하는 키까지 그렇습니다. 그날 낙동강 백사장에 몽땅 묻어버리 가족사진들로 아버지 모습을 대할 수 없는 저에게 아버지를 쏙 빼닮은 손자가 태어나준 게 如干 고맙지 않습니다.
동란이 터지던 그해, 아버지께서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에게 작고도 고급스러운 구두를 사 주셨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터라 밤마다 이불 위에서 발에다 그 구두를 신겨주시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동란에서 시가지 전체가 잿더미로 變했으니 시내 한복판 초등학교야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저는 천막 속 하교마저도 다니지 못하고 시골 書堂을 떠돌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땐 바로 3학년을 달아야 했습니다.
30여 년 전, 職場의 同僚 中에선 히로시마 원폭피해보상금을 받는다고 저에게 자랑하면서 그 사무실 위치와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었지만, 저는 아버지의 강제노역 代價를 받기가 두려웠습니다. 그땐 저도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고 자가용차량까지 굴릴 정도여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자가용은 이미 사람들의 必須 교통수단이 되었고 중고를 構入한 제 차는 많이 털털거렸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강제징용은 結局 다른 無數한 侵奪行爲 被害와 합쳐져 巨大한 대일청구권 資本이 되었고 그 資金은 결국 나라경제를 세우는데 종잣돈이 되었습니다. 難世에 英雄 난다는 말처럼 나라를 富强하게 만든 인물이 그때 나타났고, 그는 뜻밖에도 아버지와 선산군 同鄕인데다 아버지 3년 두 태어난 분이 었습니다. 아버지 고향 어른인데도 못난 아들은 그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데다 시월유신을 結行한 것이 못마땅해 生存해 계실 때까진 계속 비판적 視角을 가졌던 게 지금은 後悔되기도 합니다.
半世紀 넘게 부산에서 살면서 每年 아버지 떠나신 날이면 유엔묘지를 찾아 그곳에 安葬된 勇士들을 만나면서 아버지를 回顧했던 일들이 走馬燈처럼 떠오름니다. 새로 들어선 부산 강제징용역사관은 徵用에 끌려간 後孫이라면 역사관 探訪으로 끝내지 말고 死線을 넘나든 그 현장을 직접 踏査하라고 일러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비록 코로나 疫病으로 길이 막혔지만 제가 아버지 만나러 그곳 세상에 발 들여놓기 전까지는 며느리와 손자들 손잡고 훗까이도와 히로시마 탄광을 찾아 아버지의 피땀이 밴 勞役現場을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머지않은 날에 아버지 뵙게 되겠지만 그동안이라도 天上永福 누리시길 손 모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