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온 나라가 이 流行歌를 모르면 촌놈(?)이라는 놀림도 甘受해야 될 때가 있었다. 實은 對處보다는 情感 어린 시골 風景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當然之事이리라. 우물 주위에 아낙들이 둘러서서 두레박질하며 얘기꽃을 피우는 情景은 祖上들로부터 전해 온 疏通과 한풀이의 解放區가 아니었을까?
내친김에 興도 돋을 겸 鄕愁를 불러올 '앵두나무 처녀' 1절을 옮겨본다.(1955년 발표된 한복남 작고/ 김정애 노래이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라 내던지고 /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 이쁜이도 금순이도 담봇짐을 쌌다네."
그런데,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앵두나무는 乾燥한 환경에 강한 편이나 過濕에는 약하므로 排水 管理를 잘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아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단 말인가. 濕한 우물 주위는 天敵과 同寢하는 꼴이니 生育할 수가 없고, 어느 거짓말쟁이가 퍼뜨린 "바람난 누군가 서울에서 잘 산다"는 소식이 霎時間에 퍼져 너도나도 따라서 물동이를 내던지고 담봇짐을 싼 게 아닐까? 아마도 작사가는 옹기종기 모여 談笑 나누는 빨간 입술들이 꼭 濃익은 앵두같이 보였겠고 열매 수확기인 4~5월을 영원히 묶어 두기 위해 떠올린 것이 앵두나무로 메타포[taphor] 處理하지 않았을까 한다.
앵두와 우물에 얽힌 나의 記憶을 召喚한다.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平凡 마을 한복판 십자로에 고향집이 자리하고 있다. 부잣집은 으레 개인 우물이 있고, 貧者들을 위해서는 공동우물이 군데군데 있는 모양새였다. 當時는 대가족제도라 한 가족당 10명 내외가 보통이었고, 우리도 조부모, 부모, 삼촌, 6남매로서 11명이었다. 부엌 곁에는 엄청 큰 물항아리 두세 개와 좀 떨어진 곳에는 구정물 통이 자리 잡았다. 날마다 우물물을 길어다 항아리 한가득 채우는 게 婦女子와 우리들의 任務였다. 特히 渴水期에는 부잣집 마당에 있는 우물물을 눈치 보면서 길어와야 했다. 이렇듯 물의 所重함과 再活用(리사이클링)을 일찍부터 알았고, 소나 돼지 죽통의 물을 위해 설거지나 세숫물 등을 따로 모았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불평과 짜증도 많이 내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날 아버지께서 重大 발표를 하셨다. 우물을 파겠다는 것이다. 온 가족이 야호! 歡呼를 하며 박수를 쳤다.
대문과 부엌 사이에 삼발이를 세우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인건비 한 푼이 아까운 터라 오롯이 우리 가족끼리 양철동이에 흙과 자갈을 올리고 내리는 데 渾身의 힘을 쏟았다. 아버지와 삼촌은 땅을 파 들어가고 우리는 위에서 끌어올리는 작업을 했다. 며칠이 걸렸는지 기억도 없지만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한숨을 쉬며 절망적인 表情을 지으셨다.
엄청난 크기의 靑石[바위]이 밑바닥에 박혀 있어 '공사 실패'라는 것이다. 온 食口가 털썩 주저앉았다. 어린 나도 줄사리를 타고 내려가 봤다. 거북 등짝 같은 놈이 우물 밑바닥 전체를 덮고 있었다. 絶望의 밤을 보내고 밝은 아침에 보니 한쪽 구석에서 물이 배어 나온 痕跡이 보였다. 온 집안이 기쁨으로 덜썩거렸다.
지나가던 물길이 낮아진 압력 차로 인해 스멀스멀 나온 것이다. 우물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어야 하는 수고가 덤으로 따라왔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쌓여만 갔다. 이후 원통형 돌우물[도래석] 쌓기와 흙 되메우기는 一瀉千里로 진행하여 아귀까지 마무리짓고 우물井字 흄[Hume]管을 安着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어느 해인가 삼촌께서 작은고모네 집에 들렀다가 앵두나무 한 그루를 가져와 심었다. 索寞한 주위보다 푸른 나무라도 있으니 韻致도 있었고 식구들의 支極精誠이 屬性으로 큰 것 같은 錯覺을 일으키게 했다. 열매까지 달리니 惟一하게 우리 동네에서 우리집이 '앵두나무 우물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는 매년 보릿고개의 철의 기다려지는 입맛 돋우는 간식거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세월 따라 가족 수가 점점 줄어들어 빈집처럼 되고, 경제발전의 德澤으로 形形色色의 과일이 登場하면서 앵두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온갖 날짐승들의 專用 晩餐 食卓으로 變했다. 2020년 여름은 역사상 最長 54일간의 장마로 因해 우물 아귀까지 물이 차는 바람에 앵두나무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枯死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뿌리 전체를 젓 담근 격이다. 工巧롭게도 張本人인 삼촌[기독교인]도 같은 해 12월에 他界하고 말았다. 草木에도 精靈이 있단 말인가. 참 然치고는... .
이 글에 힘을 싣기 위해 발품의 수고까지 곁들였다. 2021년 2월 27일 대나무 장대로 우물의 실제의 깊이를 재어보니 아련한 기억보다 조금 모자라는 5.5m[아파트 3층 높이]였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마을의 傳說인 '앵두나무 우물가' 神話가 깨진것이다. 다행히도 우물만이라도 홀로 남아 그 흔적을 證言하고 있다. 가뭄에 콩 나듯 고향에 들릴 때마다 편리한 상수도 대신에 우물에 두레박을 담그면서 나직이 勿忘草[Forget-me-not]를 부른다.
* 나직이 : 위치가 꽤 낮게. 소리가 꽤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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