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疏通하라!<2011.5.29 / 제23권 22호>

꿈 꾸는 소년 2011. 6. 12. 19:52

<엡 2:14> 그는 우리의 和平이신지라 둘로 하나늘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소통이 重要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중요한 話頭는 소통입니다. 소통이 사전적인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或은 '뜻이 서로 토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communication' 혹은 'mutual understanding(상호이해)' 입니다. 지금 우리는 트위터, 페이스 북, 카카오톡 등 소셜 웹이 세상을 主導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통을 무시하며 살아갈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민과 소통을 강조하고 전문 CEO도 회사 안에서 소통을 강조합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소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소통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소통은 우리 몸의 혈액순환과 같이 때문입니다. 血栓이 생겨 혈액순환이 잘 안되면 산소 공급이 중단되어 문제가 생깁니다. 뇌에 피가 흐르지 않으면 腦硬塞을 일으키고 心臟에 피가 흐르지 않고 막히면 心筋硬塞을 일으켜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의 건강지수, 행복지수는 소통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건강합니까? 어떤 사회가 어떤 가정이 건강한 가정 입니까?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사회와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소통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정도 병들고 이 사회도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소통을 거부하면 권력도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 왜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는가?

 

 소통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 소통이 그렇게 중요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소통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창1:27).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특별하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과 交際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위하여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소통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친밀한 사귐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소통이 중단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입니다.

 

 □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들과 다시 소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둘로 하나를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엡2:1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 동산에서 추방 당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전을 보면 聖所와 至聖所 사이에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마27:50~51).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찢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 휘장을 찢으셨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화목제물이 되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만의 소통을 위해 서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을 위해서 입니다. 그럼로 이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위로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땅서는 사람과 소통하며 살아야 합니다.

 

  □ 소통의 必수 요소

 

 첫째, 적극적인 만남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만남이 없이는 어떤 소통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통을 하려면 첫째로 적극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을 잘 하려면 하나님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자주 만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주님을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그 만남이 깊어집니다. 사람과의 소통도 만남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주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주님이 먼저 찾아가 그들을 만나셨습니다. 사람과 소통하려면 예수님처럼 내가 먼저 찾아가 만나야 합니다.

 

 둘째, 共感帶 形成

 소통이 잘 이루어지려면 서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통은 일반통행이 아니라 주고 받는 대화이기 때문에 공감이 필요합니다.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마음이 열리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통을 잘하려면 그 사람의 말에 주파수를 맞추고 맞장구를 쳐 주어야 합니다. 소통을 잘 하려면 나 중심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이해하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有益

 소통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통하여 자신의 유익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이 대상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소통은 반드시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셨습니다. 왜 주님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라사지방을 찾으셨습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잃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베드로에게 잃어버린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랬듯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인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나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나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로 인하여 서로 화해하게 되고 나로 인하여 위로를 얻고 나를 인하여 용기를 얻고 나로 인하여 꿈을 꾸고 나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나로 인하여 새 생명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