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14 : 22 ~ 33>
□ 오병이어의 奇跡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는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가장 먼저 거기 모인 무리들을 흩으셨습니다(22절).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제촉하여 배를 타고 앞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산으로 기도하려 올라가쎴습니다(23절). 왜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으로 들어가셨습니까? 세상의 歡呼와 誘惑을 이겨내기 위해서입니다. 무언가를 成就하고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出世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 예수님이 奇跡 이후 산에 올라가 기도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사역보다 아버지와의 親密한 사귐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보다 사역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역보다 주님과의 관계, 사귐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무너진 사역은 열매가 없을 뿐만 아니라 持續性이 없기 때문입니다.
□ 風浪을 만난 제자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습니다(24절). 왜 예수님이 제자들이 바다의 한 복판에서 풍랑을 만났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하였기 때문입니다.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라 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감으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생각한다면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면 풍랑도 도리어 잔잔케 도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길에도 풍랑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풍랑을 만나 고통 중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다 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막6:48). 한 밤 중에 바다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주님은 기도 중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 물 위를 걸어 찾아오신 예수님
그런데 그 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보고만 계시지 않고 물 위를 걸어 그 苦難의 현장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25절). 그런데 언제 찾아 오셨습니까? 밤 사경 입니다. 밤 4경은 새벽 4시에서 6시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초저녁에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이 밤새도록 풍랑을 만나 고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밤 4경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절마의 때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는 때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한계 상황 가운데 찾아오십니다. 절망의 때에 찾아오십니다. 내가 몸부림 칠 수 있는 힘이 다 빠졌을 때 찾아오십니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시간에 찾아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그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유령인가 하여 무서워하였습니다(26절). 그런데 예수님을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 주님은 먼저 풍랑을 잔잔케 하신 다음에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지 전에 먼저 '안심하라! 두려워핮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보다 두려움이 제거되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먼저 제거도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먼저 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단순한 믿음
베드로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荒唐하고 唐突한 提安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9절).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성난 파도가 추렁이는 바다 위로 바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물 위를 걸었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전하는 믿음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단순함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宏壯히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가졌던 단순한 믿음은 결코 무모한 행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유령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면 나로 물 위를 걷을 수 있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약속의 말씀을 듣고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바다 위에 뛰어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단순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단순해지는 것은 무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내 생각을 내려놓고 단순해 지는 것은 무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바 되어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단순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 바람을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
그런데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를 걸어 한 걸음 한 걸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던 베드로가 그만 물속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까?(30절) "바람믈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 지라" 바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을 보았다는 것은 곧 바람의 소리를 듣고 바람의 결과인 무섭게 휘몰아치는 풍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는 순간 자신의 몸이 물 속에 빠져 들어갔을까요? 그것은 바람을 보는 순간 무서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귓전을 때리는 무서운 바람의 소리를 듣는 순간, 아니 자신을 향하여 휘몰아쳐 오는 거센 풍랑을 보는 순간 무서움이 임했습니다. 왜 무서움이 임했을까요? 그 바람의 소리를 듣고 파도를 보는 순간 물 위에 서 있는 주님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의 소리만 들리고 자신을 향하여 밀려오는 파도에 가려 주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무서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무서움과 두려움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속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구원해 주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는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31절).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람을 보면 무서움이 임합니다. 무서움이 임하면 믿음의 능력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파도가 크면 클 수록 인생의 문제가 크면 더욱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풍랑을 바라보지 말고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내 인생이 해답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큰 풍랑이 휘몰아치며 내가 그 푹풍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이 바로 내 앞에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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