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그대는 容恕의 사람인가?<2012.2.19 / 제24권 8호> 김진찬 교수<총신대>

꿈 꾸는 소년 2012. 3. 8. 14:46

☞ <마 18 : 21 ~ 35>

 

 □ 용서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라는 말 앞에 콤플렉스(complex)를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설교를 듣거나 기도를 하면서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로 結心했음에도 不拘하고, 그 사람을 보면 갑자기 미워지면서 감정이 激해지는 것을 자주 經驗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용서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움츠러들고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

 

 이렇게 인간이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달마 대사는 이렇게 恨嘆했다고 합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참으로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 번 壅拙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이가 없으니"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마음이 옹졸해지는 것일까?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서 마음이 오그라든 탓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까운 식구들과 잘 아는 사람들에게서 깊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 용서를 원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용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눅 11:4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선행적 행위가 있어야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용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을 용서하셨습니다(눅23:34).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는이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삶이 용서의 삶이어야 함을 克明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님의 意圖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 머리속에서 가슴으로 향하는 먼 길

 

 본문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형제의 犯罪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앞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두세 명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라고 한것을 보면 꽤나 심각한 죄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물은 것을 보면 반복적인 범죄를 전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은 이런 자들을 세 번까지는 용서해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랍비들의 가르침을 넘어서 "일곱 번 까지 용서하오리까?"라고 물었고, 아마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산술적으로는 490번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490번을 용서하라는 의마가 아닙니다. 주님은 끝없는 복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끝없는 용서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과연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할 수 있는가?

 

 아니 한 번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것입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한 번 용서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 일만 달란트 빚진자

 

 본문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고 하신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의 나라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 방식은 용서로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일만 달란트의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를 모두 蕩減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에게 저질러진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결국 용서를 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 지를 주님은 본문의 비유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로 통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고 했다고 기술합니다. 분노와 敵愾心이 얼마난 컸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경우 일백 데나리온 때문에 憤怒의 化身으로 바뀐 것입니다. 일단 누군가를 미워하고 憎惡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가 그를 움직이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백 데나이온을 빚진 자를 미워하게 된 후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마귀의 종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些少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나"를 버리기 전에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 용서만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우리에게 잘못을 했는지 조차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 난 마음을 아물게 하기보다는 그 상처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셈이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한 번 상처를 준 것인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復讐心을 갖게 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상처를 가하도록 許諾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結局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를 해야 우리는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평생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으려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決斷의 용서에서 情緖的 용서로, 그리고 몸의 용서로

 

 그러나 문제는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于先 용서하기 위해서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처를 받았지만 原來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용서하기로 먼저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결단의 용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용서를 결단한다고 해서 쉽게 용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그 사람을 보거나 그와 類似한 행동을 하면 미운 마음이 다시 들기 때문이죠. 따라서 가슴을 변화시키는 용서를 해야 진정한 용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정서적 용서"라고 부릅니다. 분노와 적개심의 정서 옆에, 이해하고 사랑을 보이는 긍정적인 정서를 竝置시켜, 부정적 정서를 대체시키는 것입니다. 게다가 몸이 용서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용서의 고통이  과정을 겪는 동안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하는 여행 가운데 가장 긴 여행이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旅程이라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머리로 하는 결단의 용서에서 가슴과 몸으로 하는 정서적 용서에 이르는 긴 용서의 여정을 따라 가야 합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豊盛한 생명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祝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