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 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苟且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떠 어떤 이들은 嘲弄과 채찍질뿐 아니라 結縛과 옥에 갇히는 試鍊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遊離하여 窮乏과 患難과 虐待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廣野와 산과 洞窟과 土窟에 遊離하였느니라.
□ 세상과 충돌하라
Aiden Wilson Tozer가 지은 <세상과 충돌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토저는 그 책에서 "그리스도 인들이여!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 서 나아가면 세상은 교회를 뒤따라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오늘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과 충돌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생각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이 이렇게 변하지 않는 이유는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이 어두운 세상과 충돌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과 충돌해야 복음의 권세가 드러나고 세상과 충돌해야 세상과 충돌해야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고 세상과 충돌해야 무엇인 참된 진리인지가 들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저와 여러분을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이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이 세상을 발을 딛고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기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18~19)
□ 왜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세상과 충돌할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소속이 다르고 이 세상의 사람들과 생명이 다르고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땅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부모님이 물려준 옛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부모님이 물려준 생명 이외에 예수님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요일5:11~12) 그러면 예수를 믿음으로 갖게 된 새로운 생명은 어떤 생명입니까? 죄와는 무관하고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의 법에서 해방되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죄와 법에서 해방되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인하여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의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원수가 아닙니다. 죽음은 더 이상은 우리에게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죽음이란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뿐이고 그 영광을 맛보기 위한 수준에 不過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망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는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누가 敢히 사망 권세를 향하여 이렇게 號令하고 호통을 칠 수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들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러므로 이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들은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부활을 믿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리라"(38절a) 여기서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苦難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35절)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은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그런데 그들은 끔직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난을 받아도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더 좋은 부활이란 어떤 것일까요? 더 좋은 부활은 생명의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심판의 부활이 있고 생명의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5:28~29) 생명의 부활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부활이란 말 그대로 심판에 참여하게 되는 부활을 말합니다. 더 좋은 부활이란 더 좋은 영광과 賞給을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 모두의 부활이 다 똑같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고전15:41~42절a)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더 좋은 부활,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얻고자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38절a) 여기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세상에 대하여 특별하게 가치를 附與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그렇게 특별하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지나가는 나그네로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나그네 인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났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배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그네로의 삶을 살았습니다.(히 11:15~16) 나그네의 삶은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아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인생의 본향을 사모하며 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그네 인생을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過度하게 執着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과도한 집착을 하게 되면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습니다. 아니 매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그네 인생을 사는 자는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과도한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 노아, 아브라함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을 嫌惡하거나 排斥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빛이 필요할 만큼 어둡고 소금이 필요할 만큼 썩어진 이 세상 속에서 한 줄기이 빛이 되고 한 줌의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우리 인생의 해답이 되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나그네로서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천국의 소망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 답게 살고 그리스도인답게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
'오륜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2013.04.14/제25권 15호> (0) | 2013.04.28 |
---|---|
버린 돌이 머릿돌로<2013.4.7/제25권 14호> - 김정우 목사 (0) | 2013.04.12 |
두 마리의 염소를 잊지 말라<2013.03.24/제25권 12호> (0) | 2013.03.24 |
감사하는 자가 누리는 축복<2013.03.17/제25권 11호> (0) | 2013.03.24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라<2013.03.10/제25권 10호> (0) | 2013.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