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기 목사

[방선기 목사의 생활신앙(9)] 이원론에 대해서②

꿈 꾸는 소년 2013. 9. 9. 05:12

[방선기 목사의 생활신앙(9)] 이원론에 대해서②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합 대표)
2010년 06월 04일 (금) 17:05:14 기독신문 ekd@kidok.com

   
  ▲ 방선기 목사  
지난주에 생각해 본 ‘주의 일’에 대한 이해가 역사 속에서 왜곡된 이유는 헬라철학에 영향을 받은 신학적 편견 때문이다. 초대교회 때도 이미 영지주의의 폐해가 기록되듯이 오랜 역사를 가진 헬라의 이원론적 사고의 영향 때문이다. 성속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신학은 로마 가톨릭의 두드러진 특징이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4세기에 유세비우스 때부터 가닥이 잡혀 있었다.

유세비우스는 성스러운 일과 속된 일을 구분하여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을 섬기는 구별된 삶만이 영원히 완벽한 성도의 모습이다. 농사, 장사 등 세속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한 등급 낮은 경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경향이 중세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그 기조가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확대되었다. 종교개혁은 이런 왜곡된 이원론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며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성속의 이해로 돌아가려고 시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가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던 성속의 구분을 거부하고 둘은 그 지위에는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성직자)으로 부름받았고 소명은 일상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녀가 요리와 청소를 하고 집안일을 할 때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그 일을 한다면, 그렇게 하찮은 일도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행하는 성결과 금욕의 일을 압도하는 섬김과 봉사의 일로 칭찬받아야 한다.”

“모든 세상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아닌 것이 없을 것이고 교회뿐 아니라 집까지, 부엌, 광, 작업장, 논과 밭까지도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될 수 있다.”

루터는 교회와 관련된 일이 아닌 세상에서 하는 일이 얼마든지 ‘주의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 칼빈 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주석하면서 ‘주의 일’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터가 세속의 직업 속에도 거룩함이 있다는 획기적 언급을 할 때 칼빈은 자신의 생각을 누가복음 10장 38절 이하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에 관한 주석에서 밝혔다.

“세속적인 일들을 멀리하고 묵상에 침잠함으로써 천사와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부지런히 노동하도록 창조받은 존재이고 자기 소명에 열중하고 어떻게 공동선을 위해 살 수 있는가를 부지런히 살피는 일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직업과 일상에 대한 이해는 청교도들에게 이르러 더욱 확장되고 강화되었다. 리랜드 라이큰은 이렇게 언급한다. “청교도들이 어떤 태도로 일을 대했는지 알려면 그들이 무엇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면 된다. 수세기 동안 일을 ‘거룩한’ 일과 ‘속된’ 일, 이렇게 두 범주로 나누는 습관이 있었다. 거룩한 일은 종교적인 전문가 집단이 하는 일이었다. 나머지 다른 일은 속되다는 낙인을 받았다. … 그러나 이 성속 이분법은 청교도들이 노동 이론의 출발선으로 삼기를 거부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계속하여 리랜드 라이큰이 소개하는 청교도들의 이야기도 고무적이다. “윌리암 퍼킨즈는 ‘비록 집안 청소나 양치기 등의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어떤 소명으로라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천명했다. 나다나엘 매더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모든 활동이 영화(靈化)된다. 이를테면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은혜를 드러내는 활동이 되고 먹고 마시는 일도 순종의 일이 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고귀한 일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상 개괄적인 영육이원론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첫째로 ‘주의 일’과 ‘세상 일’을 대조시켜 영적으로 가치를 차별하는 것은 이원론적 헬라철학과 중세신학의 왜곡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견해를 뒤집어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이 거룩한 일로 여긴 ‘주의 일’은 종교적인 일이나 교회에 관련된 일로 제한되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얼마든지 ‘주의 일’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종류의 구별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주의 일’을 종교적인 일로 제한하거나 심지어는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일로 제한하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오류이지만 실제적으로 크리스천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데(마 5:16) 장애가 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일을 그만 두거나 유보하고 종교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 개혁주의신학의 전통을 잇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이나 종교적인 일이나 관계없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주의 일은 일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동기와 자세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