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17~18> 만일 너희 믿음의 祭物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奠(제사.드리다.바치다)祭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나는 기뻐한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인데 무려 기쁨이라는 단어가 18회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7절과 18절에만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4번이나 登場합니다. 기쁨은 한마디로 빌립보서의 주제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계속적으로 기쁨을 말하는 것을 보면 비록 몸은 감옥 안에 있었지만 자신 안에 기쁨이 充滿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 안에 있었던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누리고 있었던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첫째로, 섬김과 犧牲의 기쁨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17a)"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獻身과 熱情을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그러한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전제란 드려진 제물을 더 향기나게 하는 副次的 제물을 의미합니다. 제물을 드려 제사를 지낼 때 마지막에 드려진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붓습니다. 제물 위에 쏟아 붓는 포도주의 색깔이 피를 상징하는 붉은 색이고 마지막 처리로 다 쏟아 붓는다는 이미지 때문에 전제는 언제나 죽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라면 그들의 믿음과 섬김 위에 자신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전제로 부어진 포도주의 수중기처럼 사라진다 할지라도 자신은 기뻐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 안에 있어던 기쁨은 섬김과 희생의 기쁨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과 주님이 세우신 몸된 교회를 위한 자신의 섬김과 희생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섬김과 희생을 억울함으로, 損害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기쁨 중에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었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도 있지만 섬김의 기쁨, 희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의 기쁨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아는 기쁨입니다. 나의 欲望이 充足되고 나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바로 섬김과 희생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캘커타 슬럼가[slum街]에서 평생을 섬겼던 테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들에게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을 때, 거기에는 인간적인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내가 이웃을 섬길 때, 거기에는 神的인 기쁨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고 대접을 받으면 거기에는 인간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과 희생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인 기쁨을 누리려면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희생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둘째로, 主 안에서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바울이 가졌던 기쁨은 바로 주 안에서 기쁨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기쁨이란
①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恩惠로 구원받은 기쁨입니다. 복음을 隨從들게 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기쁨입니다. 기도의 應答으로 말미암는 기쁨입니다. 임마누엘[
②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말합니다.
주님 안에는 狀況을 뛰어넘는 榮光스럽고 神秘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充滿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또 우리 주님은 이 땅을 떠나기전에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라(요17:13)" 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바로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을 우리가 누리며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기쁨은 환경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죽음도 빼앗아갈 수 없는 그런 기쁨입니다. 스데반의 모습에서 보듯 죽음의 순간에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며 밝게 웃을 수 있는 그런 기쁨입니다. 인생의 밤 가운데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데 주 안에 있는 기쁨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 있어야 고통스러운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 기뻐하고 기뻐하라
사도 바울에게는 섬김과 희생의 기쁨이 있었고 주 안에서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8절)"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기뻐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凡事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항상 기뻐하면 사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b)" 여호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힘이 됩니다. 웃음은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도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의학적으로도 보면 웃음과 기쁨은 사람의 심장을 튼튼하게 해 주고 뇌세포의 활동을 촉진시켜 암기력과 종합적 판단능력을 향상시켜 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한 많이 웃고 크게 웃으면서 기쁨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삶에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전도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벧전 3:15절을 보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된 우리는 언제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게 하는 삶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절망적이고 자신의 환경과 가정이 인생을 비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처럼 그렇게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겠느냐며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을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함께 누리기를 소망했듯이 여러분 안에 있는 그 기쁨을 여러분의 가족 모두가 함께 누리고 여러분의 직장의 모든 동료들이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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