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매력적인 사람, 존귀한 사람<2010.10.24./제22권 43호>

꿈 꾸는 소년 2010. 10. 26. 11:09

☞ <빌 2:25~30>

 

 □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성도 중의 한 사람을 대표로 세워 바울에게로 보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성도들의 선교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있는 바울을 시중들며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름의 뜻은 매력적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이방신과 관련되어진 헬라 세계에서 자주 흔하게 사용되던 이름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인생은 정말 자신이 이름답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매력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 에바브로디도는 누구인가?

 

 1. 필요로 하는 사람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25절b)" 사도 바울은 지금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돌려 보내면서 그가 너희에게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돌려보낸다고 말합니다. 사실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있는 바울 자신에게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와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교회에도 에바브로디도가 필요한 사람임을 알았기에 지금 그를 돌려보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도, 빌립보교회에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나의 형제

 바울은 지금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가리켜 "나의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만큼 가장 親密하고 가까운 사이임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남자 성도를 '형제'라고  부릅니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형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생명과 사랑을 나눈 친밀한 관계를 형제라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누며 사랑과 생명을 함께 나누는 가장 가까운 사이를 형제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에바브로디도는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와 함께 수고하고 나와 함께 군사된자"라고 말합니다. '함께'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복음을 전하고 영적인 전쟁을 함에 있어서는 '홀로'보다 '함께'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홀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함께 전함이 좋습니다. 홀로 전쟁을 치루는 것보다 함께 전쟁을 치루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 홀로 하는 것은 잘 하는데 함께 하는 것은 잘 못합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 홀로 잘 하는 것보다는 함께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 자신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자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懇切히 思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회의 성도들을 얼마나 간절히 사랑하고 보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병든 것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듣고 걱정하는 것 때문에 甚히 근심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병든 것 때문에 근심한 것이 아니라, 혹시 빌리보교회 성도들이 자신 때문에 落膽하지는 않을까, 失足하지는 않을까를 생각하며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든 것 때문에 하나님의 榮光이 가리워질까봐, 자신의  병듦이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할까봐 매우 마음이 아파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자신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5.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자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울을 도왔습니다(30절).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자신을 섬긴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브리사가와 아굴라 부부입니다(롬16:4). 그리고 다윗에게도 목숨을 걸고 적진 속으로 뛰어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떠와 마시게한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 근심 위에 근심

 

 에바브로디도가 먼 길을 달려와 이렇게 자신을 섬기다 병이 들어 죽게 된 상황이 되었을 때 바울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의 그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에바브로디도를 矜恤히 여겨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셨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만이  아니라 바울 자신도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겪었던 근심은 근심위에 근심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에게 있었던 근심 위에 근심은 무엇일까요? 자신을 도우려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죽을 병에 걸리므로 자신 안에 있었던 근심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갖게 될 근심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도 세상을 살다보면 근심 위에 근심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한 가지 근심만이 아니라 이중적 근심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처럼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열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소리를 높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던 것처럼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 이렇게 맞이하라(29절)

 

 이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돌려보내면서 가장 먼저 주 안에서 '기쁨으로 迎接하라'고 말합니다. 돌아오는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은 사실 편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맡긴 일을 穩全히 끝내지 못하고 병이 들어 근심과 念慮만 안긴 채 돌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不狗하고 개선장군처럼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여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음엔 '존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자기의 과업을 다 완수하지 못하고 중간에 몸이 병들어 오게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를 존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해 수종드는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존경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에바브로디도처럼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있어야 높은 지위에 있어야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야 존귀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아베스는 불행의 분깃을 안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야베스는 다른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대상4:9). 저는 우리 오륜의 모든 지체들이 에바브로디도처럼 매력적인 사람,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