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악인의 亨通을 부러워하지 말라<2013.12.08/ 제25권 49호>

꿈 꾸는 소년 2014. 1. 21. 18:45

 <잠 24:16~22>

 

 오늘 본문은 악인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악인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 악인이라?

 

 사람들은 의인과 악인을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누구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시10:4) 사도 바울은 악인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롬1:28)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악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보기에 선하게 살고 시대의 정의를 위해 살고 인류 역사에 많은 공헌과 업적을 남겨도 그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악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4편 1절에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 원수의 넘어짐을 기뻐하지 말라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된 저와 여러분에게 원수의 넘어짐을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려질 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17절) 우리 안에 타락한 죄성으로 말미암는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되고 상대의 넘어짐이 기쁨이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실수만 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나를 대적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원수가 넘어지고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벅찬 감격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앓았던 이가 빠진 것처럼, 막혔던 콧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져 고통을 당할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 원수의 넘어짐을 기뻐하면 안되는가?

 

 첫째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18절a) 원수의 넘어짐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은 원수의 넘어짐을 보며 기뻐하지 말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위해 악인을 심판하시지만 그 마음은 편치 않으십니다. 자식을 징계하는 부모의 마음이 편치 않듯이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역시 슬프고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넘어짐을 기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악인의 嗔怒(성을 내어 노여워함)가 내게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18절b) 비록 원수가 넘어지더라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하나님은 그 진노를 여러분에게 옮기십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도 넘어지고 엎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넘어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더 자극하여 더 많은 경쟁의식과 비교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데 자꾸 우리가 악인의 넘어짐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면 우리 안에 죄성을 더 자극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더 많은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갖게 됩니다.

 

 □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악인의 넘어짐을 보고 기뻐하지 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19절)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때 가장 속이 상합니까?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입니까? 물론 그럴 때도 속이 상하지만 정말 속이 상할 때는 악인의 형통함을 볼 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인을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사탄(Satan : 적대자)은 우리를 직접 공격하여 넘어뜨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게 하여 우리 스스로 신앙의 懷疑에 빠지게 만들고 우리 스스로 마음이 무너지게 하고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 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되는가?

 

 첫째로, 장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大抵(대체로 보아서)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20절b) 왜 악인에게 장래가 없을까요? 그것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16절b) 의인은 일곱 넘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을 말미암아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엎드러진다는 말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악인은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합니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한 번의 재앙과 환난에도 엎드러지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엎드러진 다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가장 큰 저주는 바로 미래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은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까? 악인에게는 미래와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악인의 등불은 꺼지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20절b) 지금 우리의 눈에는 악인의 등불이 빛나 보입니다. 화려하게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등불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등불을 보고 몰려듭니다. 그러나 악인의 등불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악인의 등불이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악인은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후면 사라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37:10) 그러면 왜 악인의 등불이 영원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재앙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쟁앙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어떤 멸망을 받게 됩니까?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방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시9:17) 악인들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스올입니다. 스올은 음부를 말합니다. 곧 지옥을 말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목마름과 괴로움이 있는 곳입니다. 악인의 결국은 이 부자처럼 음부의 고통 중에 떨어져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눅16:24)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 두리를 싫어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말미암아 일시적인 興旺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흥왕은 문자 그대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악인의 등불은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