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음부에서 들리는 소리<제26권 21호 / 2014.05.25>

꿈 꾸는 소년 2014. 9. 28. 12:07

 <눅 16:19~31>

 

 □ 비유인가? 실화인가?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입니다. 어릴때 제일 많이 듣고 배웠던 말씀이 바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비유일까요? 실화일까요? 복음 부의자들은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화로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존재했던 어떤 부자와 그 집 대문에서 얻어먹고 살았던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실화가 아닌 순수한 비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부자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거지 나사로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이기적이고 영적인 교만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유대인들의 최후의 운명을 경고하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문맥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돈을 좋아하고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기 위한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비유로 생각하는 자들이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에 대한 리얼한 장면들을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한 경고와 책망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의 주장처럼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면 이 비유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말씀들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주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바리새인들의 영적교만을 책망하실 뿐만 아니라 사후의 세상이 어떻게 실제로 존재하며 죽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죽음은 평등하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죽음이 얼마나 평등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부자는 부자답게 왕과 귀족이 입은 자주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며 인생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이 부자가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자는 부자이기에 죽은 다음 화려한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장사되었습니다. 죽음의 시기와 모양과 방법은 각기 다릅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히9:27절a).라는 말씀처럼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습니다. 많이 배운 자도 죽고 배우지 못한 자도 죽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죽고 악하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한 사람도 죽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더 자도 죽었고 내시도 죽었습니다.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며 울었다는 알렉산더 대제도 죽었고 불로초를 구했던 진시황제도 죽었습니다. 언젠가는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죽고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가장 평등한 것입니다. 

 

 □ 죽음은 끝이 아니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상사되매"(22절) 나사로의 영혼이 육체의 장막을 벗는 그 순간 천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영혼을 받을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나사로가 들어간 천국을 장소적 개념이 아닌 품으로 표현한 것은 천국을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위로가 있는 곳임을 말해주기 위해서 입니다. 품은 언제나 따뜻함과 안전한 보호와 위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과 안식과 위로가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나사로는 이 땅에서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게 인생을 살았지만 죽어 그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 음부의 고통 중에 떨어졌습니다(23절). 부자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인 줄 알았는데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되었습니다. 음부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을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의식이 있는 곳이며 죽음과 함께 곧 바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죽음 이후 얼마 동안 그 영혼이 배회하다가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죽음과 동시에 곧 바로 들어갔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의 시작입니다. 영을 가진 인간은 죽어 천국으로 가든지 아니면 지옥으로 가든지 두 길 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중간에 중립지역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결코 신화가 아닙니다.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 하신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 음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첫째,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24절b). 얼마나 비참한 탄식이며 절규입니까? 지옥은 이렇게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얼마나 목마름의 고통이 심했으면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했겠습니까? 물 한 잔도 아닙니다. 물 한 방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25절). 지옥은 물 한 바울의 자비도 단절된 곳입니다. 오늘 내 가족 중에 내 사랑하는 가운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여 음부의 고통 중에 떨어진다면 그들 역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음부의 고통 중에 들려오는 이 소리를 듣고 싶으십니까? 

 

 둘째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나사로를 보내어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음부의 고통 중에 괴로워하던 이 부자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자기 형제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보내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여 아니 내가 이렇게 음부의 고통 중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여 그들로 이 고통을 받는 곳에 오직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내어 이 지옥의 참상을 알려서 내 형제들만큼은 이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부자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이 고통 받은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영혼들의 간절한 바람은 제사를 지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으 무덤을 화려하게 치장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처럼 부자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떨어진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자기의 가족들이 자기처럼 살다가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에 떨어진 모든 영혼들의 울부짖음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부자의 간절한 부르짖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죽은 영혼은 다시 세상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31절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 모세와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는 말은 구약 시대의 모세와 선지자가 예언하고 증언했던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모세와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지옥에 갔다 온 자의 심정으로 모세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