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4:16~18>
□ 누가 고아인가?
성경에 보면 '고아'라는 단어가 무려 47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아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18절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전에 보면 고아란 "부모를 영의고 홀로된 아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고아를 버려진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고아란 영적으로 벌어진 자, 잊혀진자, 의지할 곳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의지할 곳이 없어 버려진 채로 인생을 사는 영적인 고아들이 많이 있습니다. 5분 후를 알지 못하는 내가 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홀로 외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 고아의 특징 : 외로움과 고독
그러면 고아의 특징이 뭡니까? 외로움과 고독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지만 누군가를 찾아가 말할 수도 없고,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그 외로움을 아십니까? 그래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은 "외로움이 죽음에 이르는병"이라고 말합니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존 카치오프(John Cacioppo) 교수에 의하면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비만인 사람보다 사망할 확률이 2배나 높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외로움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외로움과 고독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아담을 지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라"(창2:18)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이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이 이렇게 외로움과 고독속에 고아처럼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고아가 되지 않을 수 있나요? 아니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고아처럼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지 않을 수 있나요. 그것은 주님께서 고아처럼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절) 그런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하셨습니까? 자신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천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으사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떠나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제자들과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또다른 보혜사로 다시 와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16절)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보혜사람 '곁에서 돕는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체의 모습으로 다시 와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보다 더 신비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이 내 안에 영으로 찾아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으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곁에서 나를 도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없습니다. 세상이 어떤 종교도 절대자이신 신이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사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함께 동행하신다고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친히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내주하여 계시며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와 동행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이 이 놀라운 사실을, 이 놀라운 신비를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도 세상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을 받은 적도 없고 성령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절b)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령님을 모시고 그 성령님과 함께 거하는 사람은 이 놀라운 신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안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관계를 맺으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한 번 뿐인 인생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됩니다.(요1:12) 오늘도 주님은 영으로 여러분 안에 들어오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당신의 마음의 문 밖에서 당신이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계3:20)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려고 하실까요?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절b)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나와 교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먹는 다는 것은 곧 교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함께 마주 앉아서 먹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친밀한 사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 인생의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누구를 만나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지위를 누리고 고액이 연봉을 받고 좋은 환경에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인간을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바로 관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을 다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당신만이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에 받아 들이십시오. 이제 입술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받아 들이십시오. 그러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아에 거하는 인격적 관계가 맺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해답이십니다. 더 이상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허무한 인생을 살지 마십시오. 당신은 고아가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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