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하 5:9 ~ 12>
□ 계급장을 떼고 나오라
癩病(나병)을 고침받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들어온 나아만 一行은 가장 먼저 이스라엘 왕에게 아람왕의 편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6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그 편지를 받고 자기의 옷을 찢으며 억울해 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기에 나병을 고칠 수 있느냐며 푸념을 늘어 놓았습니다. 아니 이것은 畢竟(필경) 戰爭 口實(구실)을 찾는 행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자기의 왕이 아람왕의 편지를 받고 옷을 찢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느냐"며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9절을 보면 王宮(왕궁)을 나온 나아만장군의 일행이 많은 말들과 兵車(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조용히 隱密(은밀)한 가운데 비서 한 사람만을 데리고 찾아가도 되는데 나아만은 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莫强(막강)한 權力과 威容을 誇示(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사실 계급장을 떼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자신의 地位와 권력을 다 내려놓고 나아가야 합니다. 계급장을 떼고 어린아이처럼 單純하고 謙遜(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사회적 신분이나 경력,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겔 46:10절을 보면 君主도, 왕도 성전에 예배드리러 올 때에는 무리 가운데 있다가 나오도록 했습니다. 특별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天下를 號令하는 왕도 萬王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자신이 계급장을 떼어야 합니다. 특별한 자리를 요구하거나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寶座 앞에서는 모두가 다 평등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계급장을 떼고 나아와야 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나아와야 합니다.
□ 무엇이 순종을 방해하는가?
첫째로, 自尊心
나병에 걸린 나아만은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 그 머나먼 길을 달려 왔습니다. 그 선지자를 만나면 고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期待(기대)를 가지고 많은 禮物(예물)을 준비하여 많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환영 행사는 커녕 엘리사 선지자는 방문도 열어보지 않고 但只(단지) 使喚을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사가 使者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10절)" 한 마디로 門前薄待(문전박대)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怒를 發하였습니다. 다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11절). 사실 나아만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문전박대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존심이 傷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이 순종을 방해합니다. 이 자존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로, 내 생각
나아마으로 하여금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하게 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생각과 엘리사를 통하여 宣布(선포)되는 말씀이 너무나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 이름으로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11절)" 나아만은 자신이 도착하면 엘리사가 나와 歡待하여 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아픈 부위에 손을 대고 흔들어 자신의 병을 고쳐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에리사는 나와 자신을 迎接(영접)하기는 커녕 자기의 종을 내어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당시 종교적으로 널리 행해졌던 儀式을 통한 治癒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순종이라는 새로운 처방을 提示하였습니다. 나아만의 생각과 엘리사의 생각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憤을 내며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엘리사의 영접방식과 치유방식에 憤怒(분노)해 그냥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엘리사가 내린 처방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나아만의 생각과 엘리사의 생각이 달랐듯이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사55:8). 특별히 순종을 해야 하는 일에 있어서는 더더욱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순종을 요구하실 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순종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순종을 방해합니까? 내 생각입니다. 나의 이성과 나의 경험이 기준이 되는 내 생각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혜로워도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다르면 내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내 생각을 내려 놓으면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른다는 사실입니다. 내 상식, 내 기준, 내 경험을 내려 놓으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순종의 최대 장애물은 바로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이 순종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생각을 내려 놓으십시오.
셋째로, 環境
나아만이 火를 발하고 다시 돌아 갈려고 했던 이유는 그 요단의 강물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입니다(12절). 몸을 씻으므로 나을 수 있다면 요단강보다 훨씬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기 나라에 있는 아바나와 바르발과 같은 강에서 몸을 씻으면 돼지 왜 이렇게 더러운 요단의 강에서 몸을 씻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事實 요단강은 수심이 얕고 바닥에 있는 흙들이 함께 흘러가므로 언제나 진흙색을 띠고 있는 混濁(혼탁)한 강입니다. 反面에 다메섹에 있던 아바나와 바르발은 로마의 사람들이 '황금의 강'이라고 부를 만큼 대단히 맑고 깨끗한 강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답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는 요단강이라는 환경이 더더욱 순종을 힘들게 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환경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순종을 방해합니까? 자존심입니다. 내 생각입니다. 내가 처한 환경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자존심, 내 생각, 내 방법,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오륜의 모든 성도들이 순종의 장애물을 제거하여 더 분명하게 하나님께는 Yes.를 사단에게는 No.를 宣言하며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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