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하나님의 恩惠를 侮辱하지 말라<2011.4.3/제23권 14호>

꿈 꾸는 소년 2011. 4. 13. 19:49

☞<왕하 5:16, 20~27>

 

왜 엘리사는 예물을 받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물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져오는 예물을 보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받으라고 强勸하되 그가 拒絶하니라(16절)"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 강물에 몸을 일곱 번 담금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나라로 먼저 가지 않고 요단 강물에 가서 몸을 씻으면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했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그 많은 예물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16절b)" '거절 하니라'는 동사가 현재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아만과 엘리사 사이에 예물을 두고 실랑이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을 거절한다는 것은 決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예물이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賂物이었기 때문일까요? 부정한 돈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뇌물도 아니고 부정한 돈도 아닙니다. 병을 고침 받음으로 감사해서 가져온 감사의 예물입니다.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될 만한 것이 없는 예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는 그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 엘리사는 나아만이 가져온 그 예물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나아만의 고침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나아만이 나병으로쿠터 고침받음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엘리사가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을 받았다면 나아만은 나는 할 만큼했고 드릴 만큼 드렸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은혜로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값을 주고 당연히 고침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萬一 나아만이 代價를 支拂했고 엘리사가 그 대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나병은 죄에 대한 상징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고침 받았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엘리사는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 게하시는 대가를 취하였는가?

 

 그런데 엘리사가 받지 않는 예물을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받았습니다(20절).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엘리사가 나아만이 가져온 그 많은 예물을 받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보면서 到底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불만이 싹텄습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대가를 받아 내려고 급히 나아만 일행을 뒤따라 갔습니다. 그리고 에리사가 에브라임으로부터 온 두 제자를 위하여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요구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22절). 그러면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 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으로부터 받은 그것들을 자기의 집에 감추었습니다. 왜 게하시는 엘리사가 받지 않은 예물을 대가로 받아 챙겼을까요?

  첫째로, 貪心 때문이었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가져온 그 많은 예물을 보자마자 마음에 탐심이 생겼습니다. 見物生心이라고 보는 순간 所有하고 싶어졌습니다. 모든 罪惡의 根源은 탐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욕심이 孕胎한 즉 죄를 낳고 죄가 長成한 즉 사망을 낳는다(약1:15)"고 한 것입니다.

 탐욕이 게사시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여와와의 사심을 가리켜 盟誓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기까지 하였습니다. 자기 스승이자 하나님이 사람인 엘사의 이름까지 盜用하였습니다. 엘리사가 어디를 다녀왔느냐 물을 때에도 아무데도 가지 않았노라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탐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스스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게하시가 이런 행동을 취하였을까요? 왜 게하시가 이렇게 탐욕의 노예가 되었을까요? 그것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20절a)" 이것은 엘리사의 態度와 너무나 對照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나아만이 병 고침을 받고 謝禮하겠다며 그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16절a)"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무슨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결정하였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왜 엘리사는 예물을 거절하였는데 게하시는 받았습니까? 엘리사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결정하였고 게하시는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니까 탐욕의 支配를 받게 된 것입니다. 

 

 □ 왜 게하시는 저주를 받았는가?

 

 이렇게 예물을 취하여 숨겨 두었던 게사시는 엘리사으 咀呪대로 자신만이 아니라 그 家門의 後孫들까지 나병환자가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27절). 어떻게 생각해 보면 게하시가 지은 죄에 비해 하나님이 너무 심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表面的으로 생각해 보면 그가 지은 죄에 비해 그가 받은 刑罰이 너무 엄한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의 본질을 생각해보면 그 죄의 형벌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게사시의 죄는 單純한 道德과 倫理的 次元의 죄가 아닙니다. 게하시의 죄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엘리사는 처음부터 나아만이 자신만을 의지하고 찾아왔기에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값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로 고침을 받았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가지고 온 예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데 게하시가 뒤따라가 그 예물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하시는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는 죄를 엄하게 다루십니다.

 나아만이 죄의 상징인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것은 全的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역시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 2:8에서 우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적인 죄 보다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모욕하는 죄를 엄하게 다루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십자가를 부정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怨讐로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젖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