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교회

이 은헤를 豊盛하게 하라<2011.7.3 / 제23권 27호>

꿈 꾸는 소년 2011. 7. 9. 19:40

☞ <고후 8:6 ~ 9>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심이라.

 

 □ 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예루살렘교회를 돕기로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시 편지를 보내어 飢饉과 逼迫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속히 도와 줄 것을 강력하게 勸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그 일을 구제라고 말하지 않고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이 은혜를 성취하라"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은혜"는 바로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헌금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를 성취하게 하라"는 말은 핍박과 기근으로 인하여 고통중에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하여 작정한 그 헌금을 속히 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7절에서도 예루살렘교회의 부족함을 보충해 주는 이 나눔을 "은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도 풍성하게 할지니라"(7절) 여기서 말하는 "이 은혜"도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구제를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患難과 極甚함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도왔는데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마게도냐교회에 주신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절). 성경은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돕는 救濟를 구제라 표현하지 않고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을 구제하는 단어보다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요? 그것은 은혜를 입은 자만이 나눌 수 있고 나눔이 곧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를 풍성하게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눔은 내가 받은 은혜를 더욱 풍성케 하는 것입니다. 나눌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에서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 왜 이 은혜를 풍성케 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를 풍성케 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이유는 내 안에 있는 타락한 죄성 때문이지만 표면적인 이유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기 때문에 나눔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남을 돌 볼 겨를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고린도교회는 마게도냐의 교회 보다 모든 면에 있어서 뛰어나고 풍부한 교회였습니다(7절). 교육도 많이 받아서 말도 더 잘하고 지식도 더 뛰어났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 중에 성령이 은사가 가장 많은 교회였습니다. 항구 도시에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했습니다. 하지만 핍박과 기근으로 인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작정만 하고 실해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물질, 많은 지식, 많은 은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눔에 인색했습니다. 은혜를 알면서도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反面 마게도냐교회는 환란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도왔습니다(2절). 마게도냐교회의 성도들은 우리도 힘들고 어렵다며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1절). 이것을 보면 섬김과 나눔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의 문제입니다. 은혜가 있고 없고의 문제입니다. 나눔은 은혜입니다. 

 

 □ 왜 우리는 이 은혜를 풍성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부요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보좌를 버리고 이 땅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화려한 공중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말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만큼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반세겔인 성전세를 낼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죽음 후에도 장사 지낼 무덤이 없어 남의 무덤에 장사를 지낼 만큼 가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오셨고 가난한 자로 사셨고 가난한 자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의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해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부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부족한 것을 補充하여 均等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을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困苦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13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14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의 넉넉함으로 예루살렘교회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가 있고 부자가 있습니다. 똑같이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넉넉한 자들이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우리느 나눔을 통해 은혜를 풍성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가르침입니다. 베풀고 나눔으로 균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성경이 가르침이고 원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강요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인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법을 만들어 부자의 財産을 還收하여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수고하여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나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도독질하는 자는 다시 도독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베풀고 나누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극히 작은 자,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한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잘 사는 사람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운동권 시인 박노해씨는 나 뿐인 사람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풍성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풍성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베풀며 나누며 사는 사는 것입니다.